2017년 5월 30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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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해양실크로드] 인도 첸나이의 밀라포르 항구(1)
고대 한반도까지 다녀갔던 예수의 12 사도 ‘토마’

  • 입력날짜 : 2017. 04.18. 19:02
‘토마’의 행로. 그는 해양실크로드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파르티안(이란)과 인도를 거쳐 허황옥의 선박을 타고 우리나라까지 복음을 전파하러 왔다.
우리나라 가야 지방에 사도 ‘토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소설가 표성흠은 이를 소설로도 쓰고 있다. 여행을 통해 고대에 한반도까지 온 ‘토마의 경로’를 추적해 보는 것은 재미있었다. 물론 역사적 고증이 어려운 상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가 진실된 신앙고백 어휘와 함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에게 회자돼 온 사람이어서 더욱 흥미로운 소재였다. 물론 그는 예전부터 예수님의 12제자 중 동방 쪽의 복음 전파를 담당한 사도로 알려져 있었고, 파르티아(이란)을 거쳐 남인도 첸나이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묻힌 남인도 첸나이에는 ‘산토메 성당’이 세워져 있었고, 아직도 그를 신봉하는 네스토리우스파(景敎)가 실존하고 있었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가야 지방의 흔적

표성흠은 ‘황강, 다라국의 발원’이란 장편소설에서 ‘토마’가 한반도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했다. 다라국은 지금의 경남 일대에 있었던 고대왕국 이었다. 대가야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은 불교국가인 신라가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기독교 국가인 가야와 종교전쟁을 벌인다는 이야기를 주요 줄거리로 삼고 있다. “불교국가인 신라가 가야국의 기독교를 말살했다”고 했다.

특히 신라의 진흥왕은 대가야의 건국신앙인 ‘정견모주(성모마리아)’ 신당을 부수고 장로들을 살육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 문제시되기도 했다.

작가는 당시 금관가야의 김해포구로 들어 온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과 함께 왔었을 수 있다는 기설을 내세웠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다수의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유물은 왕래가 있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아라비아 상인들이 여기까지 왔다면 사도 ‘토마’도 올 수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고대의 기독교 관련 유물이 많이 발굴되고 있는 것은 고대에 기독교가 전파됐음을 말해준다고 했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돌 십자가와 성모마리아 소상, 철제 십자문 장식’등이 이를 증명한다고 했다.

카라밧지오 作 ‘의심하는 토마’-칠흑 같이 어두운 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당신의 가슴에 난 창자국을 보여주셨다. 토마가 손가락을 넣어보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분이신지를 확인하고 있다. 카라밧지오는 강렬한 빛과 어둠의 명암의 대비를 통해 극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표현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이들은 1965년 불국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또한 대구에 토마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어린 양을 안고 있는 성모상, 두 손을 포개 고 기도하고 있는 조각상이 있다. 경산 가야동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진주박물관에는 동로마제국의 술잔인 ‘고배’가 소장되어 있다.

거기다가 고배의 긴다리 대각에 십자형의 구멍이 뚫린 못 형의 투창이 있어 성배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부산대박물관에도 십자형 투창 5개가 진열돼 있다.


▶토마의 경로

이 주장이 옳다면, 토마의 경로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토마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다가, 예수 사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동방으로 떠난다. 그는 먼저 ‘파르티아(이란)’로 가서 전도한다. 그리고 당시 아라비아 상인을 따라 배를 타고 인도로 건너간다.

그가 인도에 최초로 도달한 곳은 말라바르(Malabar) 해안의 ‘구르바유르’다. 이곳에서 복음 활동을 하다가 최초로 30㎞쯤 떨어진 ‘폰나니’란 마을에서 첫 ‘10명’의 신자를 만든다.

이를 기점으로 말라바르 해안에 기독교 기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그는 남인도 끝을 돌아 코로만델 해안의 ‘밀라포르(첸나이)’로 간다.

역사적으로는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순교하기 전 동방의 끝인 ‘한반도’까지 복음을 전파하러 갔다 왔다는 설이 있다.

그는 밀라포르가 역시 어느 정도 복음기지로 자리 잡자, 선박을 타고 북쪽 콜카타(캘커타)로 가서, 마침 한반도로 가는 허황옥 일행을 만나, 함께 배를 타고 해양실크로드를 따라 ‘김해포구’에 도착한 후, 그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함양에 복음기지를 만들고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가 인도 밀라포르에서 순교했다는 것이다.


▶의심 많지만 강직한 제자

성경에서 디디모(쌍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그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다. 영어 발음으로는 ‘토마스’다. 개신교에서는 ‘토마’, 천주교에서는 ‘도마’라고 부른다. 그는 AD 52-72년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동방을 여행했다.

토마는 의심이 많은 제자였으며, 한편으로는 강직한 제자이기도 했다.

그는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를 살리려고 유다 지역의 ‘베다니아’에 가시려고 할 때, 다른 사도들은 모두 만류했다. 잡혀 죽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토마는 “우리도 함께 가서 예수님과 생사를 같이 합시다”라고 하는 등 큰 용기를 보였다.

또 한 번은 ‘최후의 만찬’때의 일화가 전해온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예수가 말하자,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8일째에 예수님이 나타나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손으로 확인한 후에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했다.

가엾은 토마! 그는 20세기 동안을 ‘의심 많은 토마’라는 오명으로 낙인이 찍힌 채 평가돼 왔다.

그는 주님을 의심했지만 또한 믿었다. 그의 덕분에, 우리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깨달았다. “죽음의 길이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가야한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의 주여, 나의 하느님!” 등의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약 성서 안에서 “나의 주여, 나의 하느님!”이라는 가장 확실하고도 진실된 신앙 고백을 했다. 그리고 그 표현은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하나의 기도가 됐다. 찬사를 받는 은혜로운 사도다.


▶그가 묻힌 곳에 세워진 ‘산토메 성당’

첸나이의 근교 ‘밀라포르’에는 ‘산토메 성당(Santhome Cathedral)’이 있다. 순교한 ‘토마’의 시체를 묻었던 자리에 세운 성당이다. 현재 가톨릭 성지(聖地)가 되어 있어, 연중 많은 신자가 몰려든다. 16세기 초에 포르투갈이 건립했으나 허물어지고, 1893년 영국이 지금의 신고딕 건물로 개축이 남아 있다.

그가 언제 어디서 사도로 뽑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베드로와 같이 갈릴레아 출신의 어부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우리 한반도 가야국(텰양)까지 왔다고 전한다. 그가 어디까지 갔었는지는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파르티아(이란)을 거쳐 남인도에까지 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남인도 서해안인 ‘말라바르(Malabar) 해안’의 ‘구르바유르’에 첫 도착했다.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 항에서 배를 타고 이곳에 내렸다고 전해오고 있다.

당시 그는 남다른 건축 기술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왕의 눈에 띄어, 당시 왕궁을 축조하는 일에 동원됐다고 한다. 그러나 분배돼야 할 기금을 착복해 불쌍한 사람들에게 몰래 나눠줘 버렸다고 한다. 이 일로 그는 창에 찔려 죽는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예수님과 같이 옆구리가 관통돼 순교한 것이다. 이 때가 AD 72년이다. 그런 연유로 이곳은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최초로 꽃핀 곳’이다.

지금도 해안을 따라 성당들이 즐비했다. 크리스천 인구비율도 높다고 한다.

남인도에는 그를 신봉하는 네스토리우스파(景敎) 교회가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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