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4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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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드와이트 린튼의 광주사랑
홍인화
전 광주시의원·국제학박사

  • 입력날짜 : 2017. 04.23. 19:03
양림동의 한자를 풀자면 버드나무 양, 수풀 림 자를 따서 ‘버드나무가 많은 마을’ 이다. ‘광주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지는 양림동에는 여러 선교사 사택이 모여 있다. 인도아 선교사의 사택도 그 중 하나다. 인도아 선교사는 드와이트 린튼입니다.

한국역사에서 큰 역할을 하셨던 윌리엄 린튼 선교사의 아들이며 지금까지도 그의 후손들이 한국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는 린튼가문의 일원이다. 윌리엄 린튼 선교사는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인돈’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48년 동안 호남과 충청 지역에서 선교 및 교육사업에 헌신했고, 일제 강점기 당시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헌신하며 근대 한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사다. 이 때문에 언더우드 선교사만큼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인도아 선교사, 드와이트 린튼의 아버지이자 린튼 가문의 한국선교 시작인 윌리엄 린튼즉 인돈선교사를 중심으로 드와이트 린튼의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100년 가까이 이어진 린튼 가문과 한국과의 첫 인연은 1912년 대학을 갓 졸업한 21세의 나이에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첫 발을 디디며 시작되었다. 인돈 선교사는 한남대학교 설립자로서 근대 한국교육에도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다.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배후 지도했고, 3·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한국의 처참한 실정과 독립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전했다. 신흥학교 교장 당시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학교를 자진 폐교했다. 이 때문에 1940년 일제로부터 추방됐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 와중에 ‘대피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전주에 남아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면서 한국 땅을 지켰다.

이처럼 린튼 선교사의 각별했던 한국사랑은 가족과 후손들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는 한국에서 선배 선교사 유진 벨목사의 딸 샬롯과 결혼해 아들 4명을 모두 한국에서 낳았다. 그 아들 가운데 셋째 휴 린튼과 넷째인 드와이트 린튼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친의 뒤를 이어 호남일대에서 교육, 의료 봉사활동을 펼쳤다.

특히 드와이트 린튼, 한국이름으로 인도아 선교사는 양림동에서 살면서 호남신학대학교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인도아 선교사는 은퇴 후 미국에서 세계적인 부흥전도사 빌리그레이엄 목사가 당시 김일성주석의 초청을 받고 북한을 방문했을 때 통역으로 동행하기도 했다. 2010년 1월 82세, 교통사고로 숨졌을 때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부인과 3남2녀가 있었다.

린튼 가문은 1995년 북한주민을 돕기 위해 인도주의단체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Christian Friends of Korea:CFK)‘를 설립해 의료와 식량, 농기계, 비상구호품, 우물개발기술 전수등 인도적 지원활동을 적극 펼치고 있습니다. 린튼가문의 한국사랑을 마음에 간직하며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 모습을 그려본다. 그리고 이땅에서 나고 자라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또 광주가 어떤 행보를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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