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30일(화요일)
홈 >> 기획 > 기획일반

[문화 원형의 보고 '광주 사직동'] (1)프롤로그
사랑과 추억의 향기 살아 숨쉬는 광주의 명소

  • 입력날짜 : 2017. 05.10. 18:58
광주 사직동의 전경. 왼쪽 원이 사직공원, 오른쪽 원은 광주공원이다. 사직동을 대표하는 사직공원과 광주공원의 역사·문화는 광주의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광주시민들에게 사직동은 애틋한 추억의 장소다. 사직공원과 광주공원을 품고 있는 사직동은 광주시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동물원과 야외수영장, 팔각정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며, 통기타 카페는 지금도 발걸음을 유혹하는 명소로 살아 숨쉬고 있다. 이미 사라져 버렸든, 여전히 남아 있든 광주공원·사직공원이 품었던 사직동의 역사와 문화는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사직문화보존시민모임과 함께 문화원형의 보고, 사직동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20회의 여정을 시작한다. /편집자註

▲빛고을역사모임 회장(1998-2011) ▲한국 근·현대사 검정도서 검정위원(2002-2004, 교육인적자원부) ▲역사교과서 보조교재 개발 집필위원(2016-현재) ▲사직문화보존시민모임 공동대표
사직동의 연원

사직동의 ‘사직’은 1998년 사구동과 서동이 통합될 때 만들어진 이름으로 사직산에 있었던 사직단과 관련이 깊다. 조선후기 이 지역은 부동방면과 공수방면의 일부에 속했으며 사직촌(社稷村)과 교촌(校村)이 있었다.

구한말 광주군 부동방면의 사직리와 공수방면의 교촌리에 속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광주군 부동방의 신기리·사직리와 공수방면의 성저리·교촌리 일부가 합해져 광주면 향사리가 된다.

1931년 통·리의 명칭이 정(町)으로 통일될 때 광주읍 구강정과 사정이 됐고, 1935년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어 광주부 향사정·구강정이 된다.

1947년 일제 흔적을 없애기 위해 정을 가(街)와 동(洞)으로 통일할 때 구동과 사동으로 다시 개칭된다. 1948년 600호를 기준으로 통폐합하면서 사동과 구동을 합해 사구동회가 됐다가, 1952년 다시 사구동이 된다.

사구동은 197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됐으며, 1986년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자 광주직할시 서구 사구동이 된다. 1995년 3월 1일 서구에서 분리돼 남구 사구동이 된 후 1998년 서 1·2동과 합쳐 사직동이 돼 오늘에 이른다.

1975년의 사직동 전경<사진 위>과 사직공원으로 불리게 한 사직단 모습.
광주공원의 역사

인구 150만을 자랑하는 광주에는 시민들의 쉼터인 공원들이 많다. 최근에는 동 단위의 조그마한 공간만 있어도 공원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준다.

광주 최초의 공원은 1913년 일제에 의해 조성된 남구 구동에 위치한 광주공원이다. 이곳을 오늘날은 광주공원이라 부르지만 본디 거북형국의 산으로 거북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등에 5층탑(보물 제109호)을 세웠다고 전해온다. 이 때문에 이 산을 거북 ‘구’자가 들어간 성구강(聖龜岡) 또는 성거산이라 불렀다.

일제는 성거산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일본의 개국신인 천조대신의 위패를 봉안한 광주신사를 세운다. 지금 광주공원 정상부에 세워진 충혼탑 자리다. 당시 광주신사는 전라남도의 지원을 받는 지방 신사였다. 일본 천황가의 신을 모신 광주신사는 전국 읍면에 의무적으로 강요한 1938년 전후보다 25년 앞서 세워진 것으로 국내 13대 신사 중의 하나였다.

이후 광주공원은 일본인들의 차지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한 1929년 11월3일, 일본 학생들이 참배한 곳도 이곳 광주공원의 신사였다. 신사의 제사일이거나 벚꽃 축제날이 되면 광주공원은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들로 북적거렸다.

해방 직후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가장 먼저 신사가 헐린다. 그리고 1963년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22m 높이의 충혼탑(우리 위한 영의 탑)이다. 충혼탑은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광주·전남의 전몰 호국용사 1만5천867명(군인 1만745명, 경찰 5천122명)을 기리기 위한 탑이다. 일본 신사 터에 세워진 충혼탑, 그래서인지 더 의미 있어 보인다.

일제의 잔재를 헐어낸 후 많은 시설물들이 공원 곳곳을 채웠다. 시립도서관, 전남도립박물관, 구동체육관, 시민회관, 무진회관, 신광교회, 4·19문화원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충혼탑을 비롯 4·19의거영령추모비, 의병장남일심공순절비, 5·18사적비, 영랑과 용아 시비 등도 이곳 공원 자락에 세워진다.

사직공원의 역사

1970-1980년대 광주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공원이 있었다. 남구 사동 사직산의 사직공원이 그곳이다. 당시 사직공원이 광주 시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것은 벚꽃과 동물원, 야외 사직수영장 그리고 팔각정 때문이었다. 양림파출소 옆 가파르게 난 돌계단을 올라야 만나는 정자 양파정도, 입구의 7080 통기타 카페도 사직공원이 사랑받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사직공원의 이름이 처음부터 사직공원은 아니었다. 1924년에 일본 왕태자(뒤에 소화 천황)의 결혼식을 기념해 조성됐기 때문에 처음 이름은 ‘기념공원’이라 불렀고, 이미 광주공원이 있었음으로 ‘신 공원’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해방 후 일제가 만든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직단에서 이름을 따 사직공원으로 부르게 됐고, 1993년에는 폐쇄된 사직단이 복원된다.

오늘 사직공원의 랜드마크는 누가 뭐래도 전망대다. 사직공원이 만들어지고 처음 세운 전망대는 전망타워 자리의 나무전망대였다.

오늘, 나무 전망대를 배경으로 찍은 관광객의 사진이 남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운치 있는 예쁜 전망대였다. 낮은 전망대였지만 전망대에 오르면 6만이 채 되지 않던 1930년대 당시 광주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무전망대는 1973년 시멘트로 만든 팔각정으로 대체된다. 1970-1980년대 북적되던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팔각정에 올랐다. 팔각정에 올랐지만 이미 커져버린 광주를 두 눈에 다 담을 수는 없었다.

명물이 된 전망타워는 3층으로 만들어진 높이 13.7m의 타워다. 사직단의 모양을 형상화한, 광주를 상징하는 빛의 이미지를 살린 외형의 모습부터가 명품이다. 3층 역사관에서는 광주의 역사도 만날 수 있다. 최종 목적지인 옥탑 전망대에서는 산으로 가려진 곳 말고는 육안으로 광주가 한 눈에 다 보인다.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각자 살고 있는 집도 찾아볼 수 있다. 전망 타워에서 본 무등산의 모습도, 무등산이 품은 광주도 정말 아름답다.

사직공원의 또 다른 명물은 곳곳에서 만나는 시비들이다. 광주가 예향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활발한 문학 활동과 관련이 있다.

광주 전남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 백호 임제, 면앙정 송순, 눌재 박상, 하서 김인후, 충장공 김덕령, 금남공 정충신, 충무공 이순신, 고산 윤선도 뿐 아니라 현대 시인 박봉우의 ‘조선의 창호지’, 이수복의 ‘봄비’, 이동주의 ‘강강술래’ 등도 만날 수 있다.

사직공원 언저리에도 각종 시설물이 채워진다. 1941년 만들어진 광주·전남 지역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인 KBS 광주 방송국도 그 중 하나다.

지금은 상무 신도심으로 이전하고, 2003년도부터는 광주 영상예술센터와 영어 방송국으로 활용되고 있다.

정상부 서쪽 자락에는 관덕정이 설치돼 활시위를 날리는 궁터가 만들어졌으며, 산자락에는 사직도서관과 양림미술관이 자리를 잡았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나가면서 새 역사를 만들어낸다. 100년도 채 되지 않은 광주·사직공원은 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 그 속에는 일제의 잔재도, 민족의 자긍도 함께였다. 지금 남아 있든, 사라져버렸든 광주·사직공원이 품었던 사직동의 역사와 문화는 소중한 광주인들의 문화원형이 아닐 수 없다.

/글=노성태 국제고 수석교사(역사)


글=노성태 국제고 수석교사(역사)




많이본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