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4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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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프랑스 동양무역 거점, ‘퐁디셰리’ (1)
남인도 힌두문화와 어우러진 유럽 근대문화 공간

  • 입력날짜 : 2017. 05.16. 18:55
퐁디셰리 해변. 세계적인 휴양지로 연중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남인도는 문명의 때가 덜 묻은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일명 ‘드라비다 문화’라 일컬어지며, 여러 면에서 북인도와 다르다. 화려한 힌두사원이 많고, 경제적 풍요 속에 여자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닌다. 그런데 그곳에 아주 이질적인 유럽문화가 존속되고 있는 곳이 있다. ‘퐁디셰리’란 도시다. 1673년 이후로 프랑스가 지배했던 곳이다. 거리에는 아직도 프랑스어가 들린다. 프랑스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있다. 인도 고유의 힌두교문화와 서구의 근대 기독교문화가 결합되고 대비되는 것을 보는 관광은 매우 흥미롭다. 아쉬람 요가와 현대 과학을 결합한 ‘오로빈’, 힌두사원과 함께 남아 있는 서양 건축물의 조화로운 도시경관, 힌두축제와 요가 체험, 유럽식 레스토랑과 호텔 등 모든 것이 특징 있고 흥미로운 도시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북인도와 많이 다른 남인도

남인도는 북인도와 다른 점이 참 많다. 지형과 기후가 다르니 당연히 보이는 풍경도 달랐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소들도 적다. 힌두사원이 참으로 많지만, 성당과 교회도 눈에 띄게 많다. 그리고 음식 값이 싸다. 밀가루 대신에 쌀밥이 주식이고, 유체기름 대신에 야자유를 먹는다. 먹는 것이 북인도보다 풍요롭다.

남인도는 아리아인들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온 드라비다족들로 구성돼 있다. 드라비다족은 피부가 검은 편이고 사교적이다. 크게 타밀족과 텔루구족으로 나눈다. 이곳은 이슬람 영향을 덜 받아 힌두교를 신봉하는 순수한 인도문화가 오랫동안 유지돼 왔다. 화려하고 섬세하며 세밀한 감각으로 건축양식 등 여러 곳에서 그들만의 독창성을 발휘한 ‘드라비다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창조했다.

필자는 여행관련 책을 제법 읽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지는 색다른 느낌과 설렘을 줬다. 쪽빛 바다의 향기가 전해져 올 것만 같은 남국의 땅, 남인도가 바로 그곳이다. 문명의 때가 덜 묻은 점이 설렘과 기대를 줬다. 가는 곳마다 순박한 사람들의 생활방식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외다리 낚시, 황홀하게 우뚝 솟아 있는 힌두 신들의 성지, 모두가 내 마음을 들뜨게 하는 장면들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버스마다 있는 차장들 이었다. 꼭 1960-1970년대 우리 모습을 보는 듯했다. 다만 아가씨가 아닌,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란 것이 달랐다. 차비를 내면 돈을 긴 쪽으로 반을 접어 손가락 사이사이에 낀다. 또 호루라기로 ‘오라이, 스톱’ 신호를 하는 것도 흥미를 줬다. 작은 마을마다 2-3분씩 정차를 하는데, 바글거리는 사람들과 매연, 쓰레기, 소떼와 널린 소똥, 개들, 거지들, 거기에다 사방에서 울려대는 경적 때문에 골치가 지끈거렸다.

오르빌 생태공동체 마을에 있는 황금색 골프공 모양의 명상홀을 배경으로 선 필자.
또 시장이나 거리 상점에서 꽃을 수북이 쌓아놓고 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꽃을 목걸이처럼 길게 엮어서 팔기도 한다. 여자들은 머리에 꽃 장식을 하고 있는데, 대게 예뻐 보인다. 가끔 여인내들이 길가에 앉아 실로 꽃봉오리를 엮고 있어 신기했다. 상당히 빠르게 엮어 나갔다. 이름 모를 꽃도 있는데 흰색, 노란색, 황토색 등 다양하다. 엮은 것을 사면 야자 잎으로 싸서 봉투에 넣어준다. 꽃을 선물하면 누구나 좋아한다고 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해 인간관계마저 단절되는 세태에서, 낭만과 환상이 꿈틀거리는 곳으로의 여행.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여행의 묘미를 발견하는 것이 삶을 더욱 새롭고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좋은 기억, 추억이 오래 남으리라 여긴다.

▶여전히 남아있는 프랑스 식민지배

남인도 첸나이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남쪽으로 달리면 ‘퐁디셰리(Pondicherry)’란 작은 도시가 나온다. 인근의 포두케 유적에서는 고대 로마 화폐가 발굴되기도 해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1673년 프랑스가 지배했다. 동인도회사 거점을 세우고 261년간 지배했다. 17세기 말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간의 세력 다툼이 있었고, 1761년에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프랑스의 동방 식민지화는 유럽 국가들 중 가장 늦게 뛰어들었다. 1674년 인도 수라트(Surat)에 첫 상관(商館)을 설치한 데 이어, 퐁디셰리에 거점을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영국과 두 차례의 무력충돌에서 패배함으로써 확장하지는 못했다.

퐁디셰리 중심지에 있는 옛 프랑스인 거주구역. 지금도 유럽에 와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보존이 잘 돼 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걸로 알지만, 이곳은 프랑스 식민지였다. 인도 안의 이방지대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금도 프랑스어가 통용되고 있다. 해안가는 휴양지로 잘 가꿔져 있어 많은 휴양객이 찾는다. 영국으로부터는 1947년 독립했지만, 프랑스로부터는 이 땅을 1963년에야 넘겨받았다. 아직도 수만명의 인도인이 프랑스 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식민지 총독 동상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다.

▶벵골만 하얀 마을 퐁디셰리

퐁디셰리! 첸나이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162㎞ 내려오면 퐁디셰리(Pondicherry)가 나온다. ‘퐁디셰리’라고 쓰인 도시 경계를 넘어섰건만, 책에서 본 프랑스식 건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인도식 시가지를 한참 통과한 끝에 네모반듯하게 나뉜 구역에 유럽풍 집들이 나타났다. 연주황색의 건물들이 포근한 느낌을 준다. 담장과 건물 대부분이 이 색깔로 칠해져 있다. 옛 프랑스령 시절 관청으로 쓰였던 건물에 숙소를 정했다. 이름도 프랑스식이다. ‘Hotel De L’Orient’(오리엔트 호텔).

마을 이름은 ‘하얀 마을’. 벵골 만의 해변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에는 인도인이 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출입 허가를 필요로 했다. 현재도 영사관, 학교, 연구기관, 도서관, 기념물 등 프랑스 유산이 가득하다.

퐁디셰리가 특이한 것은 프랑스가 이곳을 떠나면서 수많은 프랑스 국적자를 만들고 갔다는 점이다. 피부가 흰 프랑스인이 아니고, 퐁디셰리 출생의 검은 인도인에게 프랑스 국적을 줬다. 그 수가 수만명에 달한다.

프랑스는 식민지 중 왜 유독 퐁디셰리 주민에게만 국적을 줬을까? 그것은 2차 세계대전 때 드골 장군의 호소에 따라, 프랑스 군대에 식민지 가운데 가장 먼저 합류하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 같으면 ‘민족 배신자’로 낙인찍힐 사람들이다. 하지만 누구도 문제 삼는 분위기가 아니다.

다음날 프랑스 흔적을 찾아봤다. 옛 프랑스인 거주지 ‘하얀 마을’. 해변에 위치한 어린이 공원에는 옛 프랑스 총독의 동상이 아직 서 있었다. 우리 같으면 해방 이후 당장 부셔버렸을 텐데, 그냥 놔둔 인도인의 생각이 알 수 없었다. 거리 반대편 끝에는 프랑스 총영사관이 있었다. ‘퐁디셰리 프랑스 연구소(IFP)’ 역시 하얀 마을 안에 있었다. 인도 연구와 관련해서 권위 있는 연구소란다. 아직도 해외에 있는 프랑스 연구센터로는 가장 크며, 8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일상화된 축제와 요가

가이드의 안내로 옛 프랑스인 거주지를 구경 갔다. 북인도에 비해 거리가 잘 정돈되고 비교적 깨끗하다. 길거리에 무질서하게 신들을 모셔 놓거나, 소가 어슬렁거리거나 성자들이 배회하는 모습이 거의 없다. 힌두사원 규모가 대단히 크며, 사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은 ‘고푸람’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거리에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새 옷을 사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춤추고 노래한다. 사원 앞에서 물감들인 곡식으로 문양을 만드는 처녀, 힌두 신에게 공양하는 여신도가 눈에 들어온다. 축제장에는 저녁 늦게까지 대단한 인파가 모여 들었다.

다음날 눈뜨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간 요가 체험. 1926년에 세운 ‘아쉬람’은 요가와 현대과학을 결합한 힌두교 수양지다. 세계적으로 유명해 예약해야만 사용할 수 있다. 오로빈도란 사람이 세웠다. 힌두교 아쉬람은 인도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명한 곳이다. 요가를 좀 한다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지구상의 이상향 오르빌

퐁디셰리를 찾는 것은 특별한 볼거리가 있어서만이 아니다. 오로빈도(Aurobindo)를 좇는 수도원(아슈람)과 오로빌이 있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 느긋한 마음으로 오르빌 생태공동체를 방문했다. 우리의 가나안과 같은 자급자족 공동체다.

‘오르빌’은 인도의 사상가 오로빈도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그의 영적 동반자 프랑스인 ‘미라 알파사(Mirra Alfassa 1878-1973)’가 설립한 생태 공동체 마을이다. 종교, 인종, 국적을 초월해 조화롭게 사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오르빌’이란 이름은 ‘스리 오로빈도’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마을 중앙에는 ‘황금색 골프공 모양의 명상홀’이 있는데, 인류 공동체의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1960년대 후반 프랑스와 독일의 젊은이들이 자본과 전쟁이 없는 인도를 찾아와 ‘미라 알파사’가 제안한 ‘자립형 생태공동체’에 서로 뜻을 같이해서 만들었다. 1968년에 124개국 청소년이 모여 ‘오로빌 헌장’을 발표하면서 현실화됐다.

처음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많았다. 한 때는 교육과 의료서비스가 미비해 많이 떠나가 존폐의 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친환경 제품을 생산하고 수출도 하면서 어느 정도 수익도 창출하고 인정받고 있다. 현재는 전 세계에서 약 2천명이 살고 있는데, 한국인도 40-50명 정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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