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4일(금요일)
홈 >> 기획 > 기획일반

[문화 원형의 보고 '광주 사직동'] (2) 사직동에 깃든 의로움
“누군가 병든 역사 위해 십자가 질 때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

  • 입력날짜 : 2017. 05.17. 18:38
4·19 추모비.
광주공원 일대는 일제의 흔적과 친일의 잔재, 민족주의적 저항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광주문화의 원형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인형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
문화의 원형으로는 성거사지오층석탑, 거북전설, 향교,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터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광주공원 일대는 일제에 의한 민족혼 말살 작업의 대상지가 된다. 일제는 1906년 성거산 포대를 설치했고 1908년 일본군 병사를 애도하기 위한 충혼탑 건립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1913년에는 성거산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1914년 광주공원 정상에 신사를 설립하게 된다.

성거산 일대가 이러한 처참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은 그 안에 내재된 민족정기를 수호하려는 의로움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호남 의창소 본부이기도 했던 광주향교는 1896년 기우만 의병부대의 집결지였고 인근의 광주천 서천교는 기삼연 의병장이 처형된 장소이기도 하다.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역시 이 일대가 일제를 몰아내겠다는 의로움의 실천이 이뤄진 장소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오롯이 현대사의 저항정신으로 이어졌다. 광주는 서울·마산과 더불어 전국 3대 4·19발상지 중 하나이며 혁명의 단초인 3·15부정선거에 대한 전국 최초의 항쟁지이기도 하다.

혁명 2주기인 1962년 4월19일, 혁명 당시 목숨 바친 이들을 추모하고 혁명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 광주공원에 4·19의거영령추모비를 제막하고 맞은편에 4·19문화원을 건립했다.

류동은 열사 추모비.
4·19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흘린 피는 5·18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민주·인권·평화의 광주정신으로 승화한다.

광주공원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훈련장이자 시민군 편성지였다. 시민군이 편성되고 사격훈련을 실시했으며 지도부가 형성돼 24일 도청으로 통합될 때까지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아 시내를 순찰하고 시민군 차량에 번호를 써서 등록하는 등 치안 업무를 맡았다. 이렇게 광주공원 일대는 광주가 겪은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5·18과 관련해 빼 놓을 수 없는 장소와 인물이 있다.

광주공원 어린이놀이터 바로 아래 신광교회에서 경북포항출신의 류연창 목사가 시무했고 그의 아들 류동운 열사가 성장했다.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 류연창 목사는 대표적 반체제 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년들을 지도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아들인 류동운 열사(당시 고등학교 1학년)와 함께 연행되기도 했다.

당시 청년회원의 절반이 잡혀 갔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신광교회와 류연창 목사의 반 군부독재 저항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를 탐방하는 시민모임 회원들.
류동운 열사는 한국신학대 신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0년 5월 광주에 내려와 시위 중 5월18일 계엄군에 의해 상무대로 연행됐으나 5월20일 풀려났다. 몸을 추스르고 다시 시위현장으로 향하는 아들을 만류하는 아버지께 “아버지 붙잡지 마세요. 다른 집 자녀들은 다 희생하고 있는데, 왜 자기 아들만 보호하려고 합니까? 평소 소신이 왜 변합니까? 아버지 설교 말씀에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이 역사가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를 붙잡지 말아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현장으로 향하게 했다. 그는 5월27일 새벽 도청 사수 중 계엄군에 의해 산화했다. 도청으로 향하기 전 그는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이 역사를 위해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시오”라는 말을 일기에 남겼다고 한다.

류동운 열사와 추억을 같이 했던 벗들은 오랜 기간 동안, 아니 그날 이후 27년 동안 해마다 5월이면 의기소침해지고 견디기 힘들어 했다.

‘살아남은 자의 비겁함’을 버거워했고 일상이 힘들 정도의 고통을 겪는 것으로 보였다.

그 견디기 힘든 그들의 아픔을 일부 치유한 것은 추모비 건립이었다. 추모비 건립을 우상 숭배와 동일시하는 일부 교인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열사가 생활했던 사택을 바라보는 장소에 추모비를 설치했다.

1909년 체포된 의병 모습.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심남일.
당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추모의 글을 바쳤다.

자네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모두들 숨죽이며 목숨 지키려 마룻장 밑에 숨고

어떤 이는 산을 넘고 골을 지나 광주를 피해 떠나갈 때

아버지, 어미니의 손을 뿌리치며 죽음을 향해 갔던

불효자식 동운이.

못 이긴 척 손길에 꽉 잡혀 돌아오지 그랬나. 왜 그러질 못했는가?

고통과 죽음이 정년 두렵지 않았더란 말인가?

일제강점기 광주공립중학교 학생들.
목숨을 바꿀만한 믿음이더란 말인가?

어둠의 공포 속에 좁혀 오던 군화발소리, 죽음의 그림자

째비도 안되는 딱총 들고 싸워보겠단 말인가

<중략>

자네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내 자식이 딱 그날의 자네 나이가 되었다네.

아부지 어무니 앞에 떡 하니 손주 손잡고 서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된 일로 우리가 이리 모여, 철부지 류동운 시절에 뛰 놀던 터에

추모라는 이름으로 돌덩이 새워놓고 고개를 떨구고 있다니

심남일 순절비.
참 얼척없네 그려.

지척에 있는 광주공원의 4·19탑. 그러나 끊이지 않았던

선각자들의 투쟁이 계속되는 삶을 우리가 보아왔듯이

불의에 대한 믿음의 싸움이 계속되는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네.

우리의 가슴 속에서 계속 살아 숨쉬는 살아 있는 터로 신광이 계속되고

다시 자네의 뜻을 여기에 새겨 다짐과 뜻을 기리고자 함일세.

‘한 알의 씨알을 묻어두고 흘러간 사람’이라는 표현처럼 자넨

이제는 썩어간 밀알에서 짧지 않은 27년이라는 방황과 방치 속에

아니 우리의 가슴 속에 27년 동안이나 품고 힘에 겨워하던 짐 덩어리를

이 돌에 새겨 내려놓고자 함일세.

부디 항상 우리 곁에서 밝은 모습으로 지켜봐주길 바라며

옛 개구쟁이 같던 동운이, 말썽만 피울 것 같은 철없는 아들로도 좋으니

한번 보여 주게나 얼굴을···

들려 주게나 즐겨 부르던 ‘CRAZY LOVE’를

먼저 간 벗이여. 친구이며 고백적 신앙의 스승인 그대 류동운 열사여

부활의 기쁜 날이 오거든 즐겨 춤추며 다시 보세, 그날에 다시 보시게나.






많이본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