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4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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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교신 선생 이야기
홍인화
전 광주시의원·국제학박사

  • 입력날짜 : 2017. 05.18. 19:32
광주에는 귀한 분 들이 참 많다. 얼마 전에 김교신 선생의 2남 6녀 중 넷째 딸 김정옥 여사님을 만났다. 1931년생이니까 우리나이로 87세다. 광주로 시집와서 평생 동안 광주에서 살았던 이야기며 아버지 김교신 선생이 독립유공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전국방방곡곡 다니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줬다.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뜬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지난 10여 년 이상 노력한 자료와 기록물을 보여주었다. 김정옥씨는 지금부터 약10여년 전 지난 2008년 2월 보훈처에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씨는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함석헌 선생과 류달영 선생이 2002년과 2004년 건국포장을 받는 것을 보고 용기를 냈다”고 했다. 하지만 보훈처는 “정황상 김교신 선생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인정되나 본인이 직접 작성한 1차 기록이 없으니 자료를 보충해 오라”고 반려했고 김씨는 보훈처로부터 10여년 동안 5차례이상 ‘서훈 신청을 반려 한다’는 회신을 받았다고 한다.

김교신 선생이 소싯적부터 매일 써 온 일기가 수십 권이나 됐지만 다른 독립운동가에게 피해가 될까 염려해 모두 태웠다고 한다. 그래서 딸이 지금부터 10년 전 2008년부터 44살에 숨진 아버지 흔적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맸다. 김씨는 매일 광주 시내 도서관을 다니며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당시 발행된 잡지와 일간지 자료를 찾아 스크랩했다. 일본어로 된 자료는 꼼꼼히 번역했고요, 아버지가 투옥됐다는 기록을 찾아 국립기록원, 국립현충원, 독립기념관 등 전국 기관을 누비고, 독립운동가를 연구하는 교수들과도 이메일도 수시로 주고받으며 자료를 찾으면서 ‘컴맹’이던 김씨는 컴퓨터도 능숙하게 다루게 됐다. 김씨는 “아버지의 옥살이 기록을 찾기 위해 경찰청 전과 기록반에도 문의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3월 1일 김씨는 9시 뉴스를 보다가 눈이 번쩍 띄었다. 일제 때 이시카와 검사가 쓴 ‘보안법 사건’이라는 책자가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는데, 책장을 넘기는 장면에서 ‘김교신(金敎臣)’이라는 한자가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찾던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보안법 사건’은 1919년 3·1운동 때 함흥에서 만세운동을 벌여 기소된 540여 명의 이름이 육필로 기록된 책이지요, “찾았다!” 하며 미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돌려 기쁜 소식을 전했다. 65년 만에 ‘독립유공자 명예’를 78세의 딸이 찾아 준 것이다.

보훈처는 이렇게 새로 제출된 문서를 근거로 김교신 선생의 독립운동 이력을 인정했다. 지난 제65주년 광복절인 15일 김교신 선생 후손들은 광주시 시민회관에서 건국포장을 받았다. 지금은 시간이 훌쩍 지나 87세가 되셨지만 바로 한달 전에 미국에 다녀오실 만큼 건강한 모습이었다.

김교신 선생은 193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계에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킨 분이다.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현재 양정고)에서 12년간 교사로 일하며 손기정 선생을 길러냈다. 짧지만 뜨겁게 살다 간 44년 생애는 많은 젊은이에게 영향력을 끼쳤다. 김교신 선생의 훌륭한 정신을 잊지 않고 오늘에 현실화하고 내일로 잇는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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