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0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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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 1천년] 제2부 천년의 인물-(13)서재필
‘만민은 평등해야 한다’ 근대 계몽운동 선도
독립주권·백성의 자유·평등 강조 ‘갑신정변’ 주역
일·미 망명생활 후 12년만에 귀국 ‘독립신문’ 창간
정치권 마찰 美서 최후…워싱턴 ‘서재필의 날’ 선포

  • 입력날짜 : 2017. 08.08. 19:59
보성 문덕 출신 서재필은 근대 계몽운동의 선도자로 꼽힌다.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해 12년만에 돌아온 그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해 자주 독립의식을 심어줬다. 왼쪽은 서재필 동상. 보성군 문면덕 생가 부근에 조성된 서재필 공원(오른쪽)은 교육관광코스로도 제격이다.
송재 서재필은 1864년(고종 1) 1월 보성 문덕면 가천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서광언이며, 외가는 성주 이씨로 17세기 초 이조참판 이성이 보성에 내려와 터를 잡았다.

그는 5세때 본가가 있는 충남 논산 은진면에서 성장하다, 둘째 아들로서 7촌 당숙 서광하의 집으로 양자 입적됐다. 그러나 서재필의 총명함이 나타나자, 안동김씨 세도가 출신인 양어머니의 주선으로 7세에 서울로 올라가 양어머니의 동생인 외숙 판서(判書) 김성근 밑에서 성장하며 과거를 준비했다. 1882년 3월 19세 때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했고, 교서관의 부정자에 임명됐다. 당시 별시 문과 응시생 중 최연소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3개월 후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13년 동안 급여를 받지 못한 군인들이 불만을 터트려 발생한 임오군란은 결국 청군에 진압됐지만 후유증은 컸다.

이 과정에서 젊은 지식인들은 외국의 새로운 문물 도입을 통해 개화하지 않고서는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자주독립국가로 존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서재필도 서양식 군사기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문관으로서 출세길을 마다하고 신식군사기술 습득을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난으로 유학생에 대한 경비 지급이 중단돼 이듬해 7월 귀국했다. 그가 귀국해 보니 근대 조선은 들끓고 있었다. 청군과 보수사대주의의 집권층과 개화당의 갈등이 날로 첨예화되고 있었다. 드디어 1884년 충돌이 일어났다. 개화당 요인들은 평화적 수단으로는 이상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수구파를 제거하기 위해 우정국 낙성식때 기습을 감행했다. 이른바 갑신정변이다. 서재필은 새정부 수립과 함께 병조참판에 임명됐다. 이들은 독립주권임을 선포하고 백성의 자유와 평등을 내용으로 한 새 정책을 선포했다. 그러나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개입으로 개화 신정부는 삼일천하로 비운의 막을 내렸다.

송재는 5적으로 낙인찍혀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는 재빨리 피신해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송재의 망명 후 그의 가족은 참화를 당했다. 부모는 음독자살했고, 동생 재창은 종로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부인 김씨는 시부모를 따라 자살했고, 두 살난 아들은 돌볼 사람이 없어 죽고 말았다.

일본을 거쳐 미국에 도착한 서재필은 영어를 배우고 펜실베니아주 윌크스베아시에 있는 해리힐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은 후원자가 사망하는 바람에 2년 만에 중단하고 미국 육군 총감부 동양어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학업을 계속해 조지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졸업, 모교의 병리학 조교수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국에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12년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한 뒤에는 미국 시민으로 행동하며 이름도 미국명인 ‘필립 제이손’이나 한국명으로 표기한 ‘피재손’을 사용했다.

그는 민중 계몽사업에 뛰어들었다. 조선의 가장 시급한 일은 민중의 계몽이라고 느꼈다. 일반 대중의 무지를 일깨우고 그들과 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정부의 지원을 받아 4면짜리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한글을 전용해 누구나 보기 쉽게 했으며, 영문판을 통해 한국의 참 모습을 외국에 알리는 데 일조했다. 정부의 부정과 무능에 날카롭게 맞섰으며, 백성의 편에서 비판 공격했다. 이에 송재는 사회계몽단체로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독립문과 독립관을 설립했다.

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외국인은 물론 한국인조차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으므로, 청국 사신을 영접하는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워 정치적인 자주독립국가 의식을 강력히 심어줬다. 그러나 집권 수구세력의 날카로운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189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재망명한 송재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던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 현지에서 한인친구회를 조직하고 한국평론이란 영문판 잡지를 발간해 실천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 1947년 미군정장관 죤 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 고문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아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19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그의 3번째 미국행이자 마지막 여정이었다.

그는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고, 1994년 4월 8일 미국에서 전명운 의사의 유해와 함께 옮겨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2008년 5월6일 미국 워싱턴시에 동상이 건립됐고, 워싱턴시에서 이날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했다. 같은 해 7월8일에는 그가 태어난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서재필기념공원’을 열었다.

그는 ‘만민이 평등해야 한다’는 근대 계몽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렸다./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보성 서재필 공원

송재 서재필의 얼을 기리고 호국정신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1991년부터 문덕면 가내마을에 있는 그의 생가 부근에 조성했다. 전체 면적은 4만6천㎡이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것과 똑같은 크기로 독립문을 복원하고, 서재필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던 외갓집인 생가를 복원했다. 또한 사당과 생가를 잇는 2㎞ 길이의 송재로와 주암호변에 조각공원을 조성했다. 그밖에 유물전시관, 동상, 토산품센터, 야외공연장, 야외촬영장 등이 주암호의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다. 유물전시관에서는 그의 유품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보성읍에서 18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만난다. 주변에 보성다원, 송광사, 낙안읍성, 운주사, 유마사, 주암호, 향토작가 전시관인 백민미술관, 대원사, 순천 고인돌공원 등이 있어 교육문화 관광코스로 적합하다.


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오성수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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