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8일(수요일)
홈 >> 특집 > 전라도 定道 1천년

[전라도 정도 1천년]제2부 천년의 인물-(14)동편제 명창 송만갑
‘지리산 남성미 상징’ 동편제 완성한 한말 최고 소리꾼
“창은 틀에 얽매인 것보다 자유로운 감정 나타내야”
고종 앞 ‘적벽가’ 불러 궁내부 별참검 임명되기도
구례·순천 등서 후진양성…춘향가·심청가 창극화

  • 입력날짜 : 2017. 08.21. 20:05
구례군 구례읍에 마련된 동편제 판소리전수관. 구례군은 국창 송만갑의 업적을 기리고, 동편제 본고장으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지난 2000년 전수관을 신축했다. 판소리전수관에서는 소리체험과 국악교실 등을 운영한다./동편제
판소리는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 크게 세 유파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 동편제는 섬진강 잔수(구례)의 동쪽지역 명창들에 의해 완성돼 구례, 남원, 순창, 곡성, 고창 등지에서 성행한 판소리를 말한다. 지리산의 남성미를 상징하는 동편제는 담백하고 웅건하면서도 산천초목이 떠는 듯한 호령조가 많다. 웅장하면서 호탕한 소리인 우조를 많이 사용하고 발성초(發聲初·입을 열어 처음 내는 소리)가 진중하다. 통성을 쓰며 소리끝을 짧게 끊는 등 대마디 대장단의 특징이 있다. 동편제는 국창 송만갑이 완성시켰다.

송만갑은 1865년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를 두고 구례, 진주, 남원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순천 낙안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전통적으로 판소리를 이어온 집안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부친이 명창 송우룡, 할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알려진 송흥록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동편제 판소리의 대가였던 박만순에게 찾아가 소리를 배웠다. 송만갑은 7세 때 소리공부를 시작해 13세 때 아이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10세때는 전주 대사습에 나가 춘향가로 전라감사에서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10대 때 벌써 전라도 일대에서 명창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에 참가했다. 그는 이미 동편제의 소리꾼으로서 자질을 인정받았다.

판소리전수관 제공 동편제 판소리전수관 국악교실에서 어린이들이 판소리를 배우고 있다.
그후 청년이 될 때까지 경치 좋은 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새로운 창법을 연구했다.

그는 ‘창이란 어떤 틀에 얽매여 부르는 것보다 자유로운 감정을 나타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전국 순회를 했다.

가는 곳마다 구경꾼들로 만원을 이뤘고 그 명성이 높아지자 당시 전라감사는 그에게 참봉벼슬을 내렸다.

송만갑의 동편제 창법은 할아버지 송흥록으로부터 전해지는 집안의 전통적 법제(法制)에서는 많이 벗어났다. 이 때문에 부친 송우룡과 소리논쟁을 일으켰고 집안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웅장하고 호탕한 동편 소리의 특성에다 새로운 창법을 더해 불렀는데 당시 시대적인 특성과 유행을 반영해 통속과 평이를 신조로 한 동편의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는 상청(고음)에서 탁월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소문은 궐내에까지 닿았다. 1902년 고종의 명으로 조선팔도에서 명창과 춤꾼, 기생들을 불러 모아 협률사를 만들 때 명창 김창환과 함께 가장 먼저 참가했다.

고종이 소리를 듣고 싶어해 어전에서 적벽가를 부르게 된다. 흡족한 고종은 크게 칭찬해 감찰벼슬 위로 궁내부 별참검에 임명했다.

고종은 대궐에서 송만갑 소리를 큰 낙으로 삼았다.

국창 송만갑 동상.
1906년 협률사가 비판적인 여론 때문에 해체되자 궁내부에 소속된 별순검을 제수 받아 함경도와 황해도 일대를 감찰하며 3개월 동안 근무하기도 했다. 다른 국창들 처럼 명예직으로 벼슬을 하사받은 것과는 달리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08년 조선 최초의 사설극장인 원각사가 설립되자 이곳에서 공연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낙향해 구례에 거주하며 주변의 소리꾼들을 가르치고 양성했다.

이후 고향인 순천 낙안으로 이주해 거주했다. 또 이 시기에 자신의 노래를 음반으로 취입했는데 일본축음기회사(NIPPONOPHONE)에서 첫 음반을 제작했다. 이후 일동축음기회사(Nitto), 콜롬비아 레코드 사, 빅터 레커드 사 등에서도 제작됐다.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가 설립되자 교육부장으로 부임해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박봉래, 김정문·김광순·박녹주·박초월·김연수 등의 제자 등이 대표적이다. 또 춘향가, 심청가를 창극화했다.

그는 동편제의 꽃 적벽가 중 새타령을 특히 잘 불러 한말 명창 중 명창으로 꼽히는 소리꾼이다. 또 춘향가 중에서도 ‘농부가(農夫歌)’를 잘 불렀다.

1939년 74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구례군 구례읍 백련리 574번지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이 있으며, 그가 살았던 초가집이 복원돼 있고 노래비,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직도 전북 남원 운봉면 화수리의 묘지에는 ‘누구든 밥 한 그릇만 내 앞에 가져다 놓고 내소리 사가시오’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오성수 기자 star555@kjdaily.com         오성수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많이본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