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2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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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 최흥종의 스승, 포사이드 선교사
홍인화
전 광주시의원·국제학박사

  • 입력날짜 : 2017. 11.09. 18:53
선한 사마리아 사람 포사이드 선교사(Wiley Hamilton Forsythe·1873-1918)를 소개하겠다.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의료 선교사로 와서 전라북도 전주에서 순회 진료를 하며 고아원을 운영하다가 1905년 어느 날 밤 괴한에게 귀가 잘리고 두개골이 깨지고 얼굴과 목에 큰 상처를 입었다. 미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목포에서 의료 선교하고 있는데, 광주에서 기독병원 원장이었던 친구 윌슨선교사가 오웬(Clement Carrington Owen)선교사의 몸 상태를 보고 목포에 있는 닥터 포사이드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보를 쳤고, 닥터 포사이드는 전보를 받고 광주로 오다가 길가에 쓰러져있는 한 여인을 발견하고 가던 길을 멈추고 길에 버려진 그 여인을 살펴본다.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어 있고, 온통 상처투성이에 걸친 누더기 옷은 피고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병 환자였다. 닥터 포사이드는 위독한 동료 선교사의 병을 고치러 가는 바쁜 길이었지만 길가에 버려져 신음하고 있는 환자를 그냥 버려두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포사이드는 피고름을 흘리고 있는 그 여인을 감싸 안아 자신의 말에 태웠고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걸어서 광주로 들어왔다. 광주에 도착한 닥터 포사이드가 그의 조랑말에서 나병 환자 여인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내리는 것을 구경꾼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던 당시 광주에서 깡패로 악명이 높던 최흥종은 충격을 받고, 선교사들의 일을 적극 도왔고, 후일에 나환자를 돕는 목사가 되었다.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광주는 낯선 곳이었다. 그 여인에 대한 치료와 거처를 부탁해 보았으나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친구 선교사 닥터 윌슨과 고심 끝에 광주 동남쪽에 위치한 옹기 가마터를 발견하고 그곳을 그 여인의 임시 거처로 정하고, 선교사들이 쓰던 침구와 옷가지를 얻어 챙겨주고 목포로 갔다. 닥터 포사이드가 목포로 돌아가고 나서 파란눈 노랑머리 서양의사가 나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나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광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1912년에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나병 환자 수용소와 병원을 세웠다. 닥터 포사이드와 한 나병 환자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어서 4년만에 병원과 수용소가 준공된 것이다. 나라의 주권마저 위태롭던 그 시절 일제 강점기에 어느 누가 피고름을 끝도 없이 계속 흘리는 나병 환자들을 보살필 수 있었을까.

포사이드는 풍토병에 감염되어 선교지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투병 중에도 7년이 넘게 미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을 계속했다.

“그들이 질병에 노출되어 무방비 상태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빨리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들을 도와줍시다.”

그는 나병 환자를 돕기 위한 성금 모금과 한국으로 파송할 선교사를 모집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귀가 잘리고 나서 그 후유증과 풍토병으로 1918년 5월 9일 45세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소천 소식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슬퍼했다. 포사이드는 나병 환우들의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래서 자발적인 성금으로 닥터 포사이드 선교사 기념비를 세웠다. 일명 선한 사마리아 사람 포사이드 선교사는 진정 우리의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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