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3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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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되지 않은 기억 치료통해 떨쳐내야
트라우마
외상사건 연령·성별 상관없이 누구나 겪어
적절한 상담·돌봄으로 성장 밑거름 삼아야

  • 입력날짜 : 2017. 12.06. 19:20
전봉희 국립나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평소 트라우마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를 대상으로 진료를 하고 있다.
“선생님, 버스나 지하철에 사람들이 많이 타 있는 것만 봐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몸이 떨려서 타지를 못하겠어요.” 함께 만나면서 진료를 본 지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아주머니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우울증과 신체화장애로 진료를 받아오셨고, 증상도 호전되고 최근 가족들과의 관계도 좋아지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저야 5·18 사태 때 직접 피해를 입거나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 중에 다친 사람은 없었어요. 그래도 그 당시에 닭장차(?)에 학생들이 끌려가는 것을 보았고, 뒤에 안좋은 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인데, 이리 세월이 지나서도 제 마음을 힘들게 할 줄은 몰랐어요.” 그제야 무언가 놓친 게 있었구나 싶었다.

도움말 전봉희 국립나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모든 사람들 겪을 수 있다.

우리는 외부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켜 왔고 충분한 자원을 확보해 왔다.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합리적인 예측과 논리적인 기대에 따라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고통과 충격이 갑작스럽게 엄습해 올 때, 이러한 믿음은 와르르 무너진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교통사고, 폭행사건, 지진이나 홍수, 태풍 같은 자연재해, 전쟁, 성폭행, 아동학대, 여객선의 침몰과 같은 외상사건은 우리가 외부 환경을 언제나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기술과 사회의 발달로 통제 가능하다는 기대를 했던 만큼 더욱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외상사건은 연령의 고저, 성별 차이, 소득의 다소, 신분의 귀천, 지식의 경중, 종교의 유무, 도덕성의 차이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자원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외상사건 앞에서는 누구나 속수무책이 된다.

우리는 각종 안전사고와 교통사고, 자연재해와 산업재해 등으로 인한 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특히 예기치 않은 순간에 누군가가 겪게 되는 외상 사건은 그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 가족과 집단과 사회의 고통으로 이어지기에 시의 적절한 돌봄과 치료가 절실히 필요하다.

◇소화되지 않은 기억이 우리를 괴롭힌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먹기 귀했던 짜장면을 허겁지겁 먹은 후 심하게 체한 적이 있었다. 속이 답답해 토하고 손을 다는 등 며칠을 고생하고 난 뒤로는 짜장면은 더 이상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짜장면 모습만 봐도,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껍고, 체한 것만 같았다.

중국 음식점의 기름 냄새만 맡아도 상상만 해도 속이 안 좋아지는 것으로 확장된 경험은 수년간 중국 음식 근처도 안 가게 만들었고, 그렇게 수년이 지난 중학생이 될 무렵에야 조금씩 나아지게 됐다.

외상 기억을 먹고 체한 음식에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가 음식을 섭취하는 이유는 먹고 소화시켜 양분을 얻기 위한 것인데, 먹어서 체한 음식은 양분도 안 될 뿐더러 다른 음식까지도 못 먹게 한다. 어쩌다 그 음식이 아닌 다른 음식을 먹게 된다고 하더라도 치뤄야 하는 대가가 크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기억들도 음식으로 친다면, 맛이 있건 없건 섭취됐으니 분해되고 소화돼 양분이 되고 남은 것은 찌꺼기로 배출돼야 하는데, 워낙 갑작스럽고 덩치가 크고 안 좋은 경험은 소화가 되지 않고 체한 채로 남아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외상을 통해 성장으로!

이미 상한음식을 먹고 체했다면 앞으로 더 조심은 하겠으나, 그렇다고 먹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다. 음식 먹고 위험했다고 해서 앞으로 아무것도 안 먹고 살아갈 수도 없다. 어떻게든 지금 체한 상태를 변화시켜 소화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외상기억이 당시의 장면과 정서, 신체감각, 행동이 합쳐져서 의미를 남기며 과거 경험으로 통합될 때 우리는 회복을 넘어서서 더욱 성장하게 된다.

우리가 무서운 외상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때마다 우리의 인격이 붕괴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경험이 우리의 성장에 영향을 줄 것이며, 또 모든 다른 경험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사건 이후 우리에게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이 무엇인지 적절하게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정신적 외상을 삶의 일부로 소화시키고 융합시키려는 우리의 능력은 향상될 것이며 위험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외상 진료를 하다 보면 다양한 직업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환자 중에 반복적으로 사고 현장을 겪어오면서 ‘원래 이 일이 자신과 안 맞았고 그만두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던 구급대원 이었다.

처음 만날 때는 무언가에 쫓기고 한없이 지쳐 보였다. 안정화를 거치고 기억을 소화한 이후 ‘지금은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진료실을 나가는 그 뒷모습이 한층 더 성장한 것 같아 흐뭇함을 느낀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안 좋은 기억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의적절한 돌봄과 치료만 이뤄진다면 비온 뒤 땅이 더 굳어지듯이 한층 더 단단하고, 여유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리=오승지 기자 ohssjj@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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