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8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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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석 박사의 뮤지엄 읽기] (8) 분청사기 편호 33억원의 진실과 불편
“문화재는 소유가 아닌, 출처가 핵심임을 인식해야 한다”

  • 입력날짜 : 2018. 05.02. 18:13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한국실. 중국실과 일본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모습이다.
조선은 고려로부터 청자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고려 말 청자는 쇠락한 국운만큼이나 질이 떨어진 것이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예술품 역시 역사의 흐름에 편승해 시대정신마저 이입되지 못하게 되면 하치의 작품이 나오게 된다. 태토(胎土·도자기 몸체를 이루는 흙)는 거칠고 표면은 고르지 못했다. 그릇의 모양역시 고려청자 본연의 자태를 상실해 조악하다. 청자본연의 비색(翡色) 조는 온데간데 없고 누렇게 퇴색돼 볼품이 없다.

그나마 정쟁에 휩싸이게 되자 그런 청자마저도 납품 처는 사라지고 강진, 해남, 고창, 부안 등 해안가를 끼고 있던 청자 생산지에는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지고 도공들을 납치해가는 일도 빈번했다.

그렇지 않아도 막막한데다 안전까지 담보 받지 못하게 된 도공들이 선택한 곳은 깊은 산중이었다. 계룡산, 무등산, 지리산 자락 등이 그곳으로 안전 확보와 함께 땔감 구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속은 좋은 태토를 구하는 것도, 판로를 개척하는 것도 원활치 않아 좋은 자기를 만들 의욕도 동기도 사라지게 됐다.

윤태석
한국박물관협회 기획연구실장·문화학 박사
열악한 환경에서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자기를 빚고 굽는 일 뿐이었다. ‘잃으면 얻는 게 있다’고 했던가…. 결과적으로 그런 환경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고려의 사정이 좋았고 송나라, 일본 등과의 교역 또한 활발했을 때 이들은 가마를 만드는 것, 태토와 땔감, 그릇을 빚는 자와 문양을 넣는 이, 수주와 납품 등이 분업화된 시스템으로 대단히 선진화된 환경에서 일했다. 일은 끊이지 않았고, 생활은 넉넉했으며 신분과 대우 또한 좋았다. 납품기일에 맞춰 주문자가 원하거나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물건을 주로 만들었기에 별다른 고민도 없었다. 그러나 산속생활은 완전히 달랐다. 척박한 환경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현실에 순응하고 거기서 좋은 그릇을 빚기 위한 다양한 궁리가 필요했다. 태토와 땔감도 직접 구해야 했고 직접 빚은 그릇에 넣을 문양도 스스로 고안해야 했으며, 판매처도 알아보고 이 모든 작업을 혼자 다 해결해야 했다.

이 마저도 물건이 좋지 않으면 공염불이었기에 주어진 여건에서 창의성이 요구됐다. 청자와 환경이 결합한 궁리의 끝에서 생각해 낸 것이 분칠이었다. 표면이 거친 청자에 분을 덧바르면 거칠고 고르지 못한 면이 어느 정도 커버되기 때문이다. 마치 주근깨와 잡티를 감추기 위해 분을 두껍게 바르는 여인들의 화장법과 같은 것이다.

반면 분청사기 탄생에 대한 또 다른 주장도 있다. 고려가 기울어질 무렵 중국은 이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멸하고 한족의 명나라가 들어서게 된다. 명은 불교가 국교인 원과는 달리 자신들의 전통신앙인 유교, 그 중에서도 겉치레나 화려함보다는 검소와 소박, 절제를 큰 가치로 하는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워 모든 질서를 재편하고자 했다. 따라서 백자(白磁)는 명이 지향한 유교적인 세계관과 매우 잘 어울리는 그릇이었다. 이후 백자는 조선왕실에 전해졌고 상류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기에 이른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백자는 사옹원(司饔院·왕실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서)에서 관리하던 몇 안 되는 관요에서만 제작됐기 때문에 대중화는 물론 웬만한 권세가들조차도 소유하기 어려웠다. 그럴수록 백자를 갖고자하는 욕망은 커져 이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다. 이때 청자에 백토를 칠하기 시작했다. 몇몇 학자들은 말하는 주장이다. 이유야 어떻든 청자에 분칠을 했다해 미술사학자 고유섭(高裕燮·1905-1944)이 명명해 명사화된 분청사기(粉靑沙器)는 탄생하게 된 것이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분청사기로는 역대 최고가인 약 33억원에 낙찰된 조선 초기 ‘분청사기편호’. /연합뉴스 DB
지난달 18일(현지시간) 분청사기 편호(扁壺) 한 점이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분청사기로는 역대 최고가인 33억 원(313만2천500달러)에 팔렸다. 가히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낙찰된 병은 몸체 양면이 납작하고, 파도처럼 푸릇푸릇하게 남아있는 걸쭉한 유약 아래로 두텁게 발린 백토, 크고 작은 파도문양 중심에 배때기가 뒤집힌 물고기 한 마리를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한 획으로 기가 막히게 그려냈다.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반대편 면과 양쪽 어깨에는 조화문(彫花文,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무늬를 선으로 새기는 기법)기법으로 기하학무늬를 모던하게 장식해 냈다.

굽까지도 온전하게 덮인 두툼한 유약과 아담한 사이즈(23.5㎝), 로댕과 몬드리안도 뺨치게 할 만큼 현대적인 미감과 무작위(無作爲)의 담대한 조형미를 발산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의 저명한 컬렉터 야마모토 하쓰지로(1887-1951)가 1939년부터 소장해왔다는 확실한 족보, ‘조선전기 국보전’에도 선을 보여(1996년 호암갤러리) 얻게 된 유명세까지, 또 15-16세기에 제작됐으니 족히 500살도 넘는 긴 세월. 분청사기 명품이 갖춰야할 조건은 완벽하리만큼 빠짐없이 갖춘 수작 중의 백미인 것이다.

33억원, 적지 않은 돈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명품을 소장하는 대가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값이다. 만약에 중국 명대에 만들어진 청화백자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일본실 일부. 전통가옥과 정원까지 전시되고 있다.
아마도 이 가격에 동그라미하나는 더 붙었을 것이다. 이번 경매의 결과가 다름 아닌 우리나라 글로벌 문화척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해 씁쓸하다. 한편, 이 작품이 소더비와 함께 세계 3대 경매회사인 크리스티나 필립스 한국지사를 통해 출품(국내)됐다면 어느 정도 가격에 낙찰되었을까? 짐작컨대 채 10억원을 받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출품자체가 안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문화재가 저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문화재 반출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문화재 보호법’에 있다. 그래서 우리 문화재는 공정한 국제시세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해외시장에서 관심이 없다.

개인이 소장한 좋은 문화재가 국내로도 들어오지 못하는 장치가 됐다. 이번에 팔린 편호도 한국과 관계있는 컬렉터가 구입했다고 전해졌지만 어쩌면 한국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우리나라는 과거 고아를 많이 해외로 입양 보내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으며, 이민역시 일반화 돼있다.

사람도 해외로 보내는 판에 문화재의 출입경이 막혀있다는 것은 시대적 조류에 맞지 않다. 물론 우리가 꼭 가지고 있어야 할 문화재는 예외임은 물론이다. 문화재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출처의 문제다. 세계 어느 박물관에 있어도 그것은 영원히 고려청자이며 조선백자로 남아 우리 민족정신과 문화수준을 대변하는 상징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한류이다.

지구촌 경제, 문화의 중심 뉴욕 한복판에 있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나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LA카운티박물관(LACMA)은 물론 프랑스의 국립기메동양박물관 등 여러 국가 박물관에는 한국실이 있다. 그러나 중국, 일본실과 비교하면 소장 자료의 양이나 수준, 규모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걸 보고 누가 일본이 우리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겠는가? 우리교포 2-3세들이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까?

문화재청에 따르면 약탈 등 여타의 이유로 우리 문화재 16만8천여점이 20여 개국에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으로 들어가면 압류 당할까봐 러시아나 대만 고궁박물관은 대여를 금지하고 있다. 우리 것인데도 우리 땅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지난달 12일 국회 노웅래 의원은 공익을 목적으로 한 전시에서만이라도 국민들의 문화향유와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압류면제조항 신설을 대표발의 했다.

어떻게든 우리 문화재를 알리고 재인식의 계기를 마련하려 하는 고민이 묻어있다.

이번 분청사기 편호의 화려한 분장 속에는 이런 항변이 깊게 새겨져 있는 것이다. 편호를 보는 마음이 불편하고 슬픈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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