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1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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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김천 인현왕후길
인현왕후 恨 서려 있는 길에서 인간의 길을 묻다

  • 입력날짜 : 2018. 05.15. 18:52
수도암 가장 높은 곳에서 대적광전과 약광전이 연꽃 모양의 가야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앉아 있고, 당우 앞마당에는 동서삼층석탑(보물 제297호) 두 기가 서 있다.
산뜻한 봄날, 우리는 김천 인현왕후길을 걷기 위해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로 향한다. 창밖으로는 수도계곡이 유려하게 펼쳐지고, 연두색으로 채색을 한 산비탈이 눈부시다. 슬며시 자동차 문을 여니 상쾌한 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씻어준다. 마을 하나 없는 산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달리자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해발 700m 산속 분지에 위치한 수도리 마을이다. 마을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별천지 같다. 오래된 마을답게 마을 입구에는 전나무, 느티나무 같은 고목 10여 그루와 서낭당 역할을 하는 돌탑 1기가 서 있다. 인현왕후길은 수도리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을을 지나 수도암 가는 도로를 따라 걷는다.

인현왕후길은 수도암을 800m 정도 남겨두고 오른쪽 산비탈 임도를 따라가게 돼있으나 우리는 먼저 수도암을 다녀오기로 한다. 하늘을 가린 숲길을 지나 하늘이 열린 자리에 수도암이 앉아 있다. 높은 계단을 따라 수도암으로 들어서는데 부처님오신날을 경축하는 연등이 우리를 부처의 세계로 인도한다. 연등의 안내를 따라 산문을 들어서니 넓고 길쭉한 마당이 나오고, 마당을 지나 정면으로 높고 가파른 계단 위에 대적광전과 삼층석탑이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인현왕후길이 시작되는 수도리는 오래된 마을답게 마을 입구에는 전나무, 느티나무 같은 고목 10여 그루와 서낭당 역할을 하는 돌탑 1기가 서 있다.
긴 계단을 올라가 대적광전 앞에 서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과연 도선국사가 이 암자 터를 발견하고 좋아서 1주일 동안이나 춤을 췄다는 터답다. 우리는 대적광전을 등지고 서서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에 한동안 꼼짝을 하지 못한다. 첩첩하게 다가오는 몇 개의 산줄기 너머로 한 송이의 연꽃이 막 피어나는 모양을 한 가야산 정상의 모습 때문이다.

신비롭게 핀 이 아름다운 연꽃은 계절마다 빛깔을 바꾸면서 피어오르니, 꽃피는 봄이면 황련, 녹음 우거진 여름이면 청련, 단풍드는 가을에는 홍련, 눈 내리는 겨울에는 백련이 된다. 수도암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는 연꽃 모양을 한 가야산 봉우리가 거대한 불상인지도 모른다.

수도암 가장 높은 곳에서 대적광전과 약광전이 연꽃 모양의 가야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앉아 있고, 당우 앞마당에는 동서삼층석탑(보물 제297호) 두 기가 서 있다. 암자 앞으로 멀리 단지봉에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부드럽게 펼쳐지고, 암자를 둘러싸고 있는 산세 또한 한없이 포근하다. 두 당우에 모셔진 불상은 모두 석불이다. 대적광전에 모셔진 석굴암 본존불에 버금가는 크기의 거대한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07호)은 엄숙하고, 약광전에 모셔진 석불좌상(보물 제296호)은 인자한 향기를 내뿜는다.

해발 950m에 둥지를 튼 수도암은 우리나라의 웬만한 산보다 고도가 높아 주변의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가와 깊은 맛을 자아낸다. 새싹을 돋운 나무들은 연둣빛 바다를 이루었다. 연둣빛 바다는 번뇌의 물결이 사라지고 지혜의 바다를 이루어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어 있는 듯하다.

수도암에 서면 첩첩하게 다가오는 몇 개의 산줄기 너머로 한 송이의 연꽃이 막 피어나는 모양을 한 가야산 정상의 모습이 신비롭다.
수도암에서 부처님께 예를 갖춘 후 오던 길로 내려오니 인현왕후길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다. 출발지인 수도리에서 500m 쯤 올라오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서 수도암 길과 헤어져 산허리를 따라 완만하게 돌아가는 인현왕후길을 걷는다.

이 길을 인현왕후길이라 부른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인현왕후는 조선왕조 19대 왕인 숙종의 계비다. 자식이 없었던 인현왕후는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폐비돼 궁 밖으로 쫓겨났고, 장희빈이 새 왕비가 됐다.

궐 밖으로 쫓겨난 인현왕후는 자신의 어머니와 인연이 있는 수도산 청암사에서 3년을 보냈다. 장희빈을 등에 업은 남인의 권력남용이 심해지자 숙종은 주도세력을 서인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인현왕후는 왕비로 복위됐다. 인현왕후는 왕비로 복위된 후 7년 만에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인현왕후를 다시 폐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던 장희빈도 숙종에 의해 인현왕후가 세상을 뜬 그해에 사약을 받아야 했다.

김천시에서는 인현왕후가 3년 동안 기거했던 청암사를 품은 수도산 자락에 인현왕후길을 만들었다. 나는 인현왕후길을 걸으며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을 생각한다. 천년만년 권세를 누릴 것처럼 당당했던 사람들이 최근 줄줄이 수갑을 차는 그 광경이 장희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오솔길은 물 흐르듯 구불구불 이어지고, 일행의 발걸음도 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른다.
길은 연두색 연잎들로 덮여있어 산뜻하다. 종종 연분홍 철쭉이 청순한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노랑괴불주머니가 바위틈에서 노랗게 꽃을 피웠다. 붉은 줄기를 한 적송과 참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사이좋은 형제마냥 조화를 이룬다. 길은 물 흐르듯 구불구불 이어지고, 우리의 발걸음도 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른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은 자연스럽게 나를 바라보게 해준다. 싱그러운 숲과 감미로운 새소리가 내 가슴속에 담겨있는 탐욕과 어리석음을 씻어준다. 그윽한 숲을 만들어준 나무들이 내게는 스승도 됐다가 도반도 돼 준다. 고요한 오솔길을 따라 한발 한발 걸으며 깊은 명상에 빠져든다. 나와 자연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인현왕후길은 청암사 가는 길과 갈린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기도 하고, 요리조리 꼬불꼬불한 산길을 걷다보니 작은 계곡도 만난다. 아름드리 왕버드나무 한 그루를 지나 수도리·수도암으로 가는 도로로 내려선다. 도로 옆으로는 수도계곡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다. 수도계곡에 놓인 무지개다리를 건너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오솔길로 들어선다. 계곡에서는 티 없이 맑은 물이 고요하게 흘러간다. 계류는 바위를 적시며 흘러가고, 그 모습을 푸른 나무들이 바라보며 흐뭇해한다.

가냘프게 들려오던 물소리가 장쾌한 소리로 바뀌면서 우리의 발걸음을 용추폭포로 유인한다. 물소리가 들리더니 위풍당당한 용추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홈통처럼 패인 바위에서 17m 높이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사뭇 장엄하다. 용추폭포는 ‘용이 사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가뭄이 들 때면 주민들이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무흘구곡 제9곡인 용추폭포는 무흘구곡 최고의 풍광이자 화룡점정을 찍는 곳이다.

무흘구곡 제9곡인 용추폭포, 홈통처럼 패인 바위에서 17m 높이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사뭇 장엄하다.
용추폭포와 작별을 하고 출렁다리를 건너 다시 도로를 만난다. 여기서부터 수도리까지는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한다. 계곡 건너편으로 용추폭포까지의 길처럼 숲속 오솔길을 만들었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쉽다. 도로를 따라 걷는데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자연스러운 물 흐름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준다.

수도리 마을에 가까워지자 산비탈에 밭들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데 아그배나무 한 그루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수도산에서 단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산뜻한 봄날이다.


※여행쪽지

▶ 김천 인현왕후길은 조선조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가 폐비된 후 3년 동안 수도산 청암사에서 기거했던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 코스:수도리주차장→수도암갈림길→청암사갈림길→도로→용추폭포→수도리주차장(9㎞/3시간 소요)
▶ 출발지 내비게이션 주소 : 수도리주차장(경북 김천시 증산면 수도길 1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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