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9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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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 고추가 섰다 수필 김옥례

  • 입력날짜 : 2018. 06.04. 19:43
일손이 부족하니 고추 따러 오라는 시골 형님의 전화를 받았다. 땡볕에서 고추를 딸일을 생각하니 심란해서 망설이다가 군내 버스를 탔다. 버스가 정지 신호를 받는 동안 창밖을 보니 고추밭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고추가 예뻤다.

어느새 도착했다. 양지바른 언덕 밑에 천 포기가 넘는 고추밭엔 지렛대에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가 ‘나는 할 일이 없소.’ 하는 듯이 거만하게 서있다. 밭도랑으로 들어가니 붉은 고추들이 내 손길을 기다린 듯 반갑게 흔들흔들 거리며 살 갖에 닿는다. 가지가 휘도록 열려있는 고추들, 야들야들한 풋고추부터 끝이 꼬부라진 고추, 벌레에 물려 허옇게 찌그러진 고추, 긴 원뿔모양의 빨갛게 익은 고추들 갖가지 모양이 사람 얼굴의 생장처럼 보였다.

꽃처럼 예쁘다. 고추는 여름 더위와 비바람, 잎마름병, 탄저병 등을 이겨내고 빨갛게 익은 가을꽃이다. 나는 이 붉은 고추꽃을 닥치는 대로 따서 윗옷 자락에 품고 와서 바구니에 담았다. 소쿠리에 가득 채워지자 부자가 된 것처럼 흡족했다.

친정어머니는 빨간 고추를 마당에 널어 말리면서 우리가 멍석 옆을 지나면 항상 조심스럽게 비켜가라고 하셨다. 어린아이를 다루듯 고추를 손질하셨다. 나도 가끔 고추 말리는 일에 함께했다. 어느 날 갈퀴로 고추를 뒤적이시다가 통통하고 꼿꼿한 고추를 만지며 “이 뻘건 고추가 제일 좋아야” 신주단지 모시듯 바구니에 따로 두셨다. 그리고 흐뭇하게 보셨다. 이 고추를 햇볕에 정성껏 잘 말려 오일장에 내다 팔고, 남은 것은 자식들에게 나누어준다. 나머지 좋지 않은 고추는 당신 일 년 양념으로 사용하셨다.

고추는 우리 집 가계에 밑천이 되고 식구들의 일 년 반찬으로 버릴 게 없는 음식재료로 밥상머리에서 제왕의 자리를 차지한다.

야들야들하고 자잘한 고추는 멸치와 볶아 밥반찬으로, 청양 고추는 소금물에 삭여 장아찌로 담근다. 푸르뎅뎅한 허드레 고추는 찹쌀 풀을 고추에 입혀 말렸다가 튀겨서 반찬으로 봄까지 만들어 먹었다. 고춧잎은 씻어 항아리에 담아 된장으로 눌러두었다가, 양념을 버무려 상에 올리면 밑반찬으로 그만이다.

벌레가 먹어 쪼글쪼글 시들어 있는 고추를 보니 주름진 내 얼굴 같아 옆 고랑으로 가서 장아찌 담그려고 매운 고추를 따는데 조카가 생각났다.

조카는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궂은일도 마다 않고 닥치는 대로 돌고 도는 팽이처럼 돌면서 매서웁게 살았다. 어느 날 길에서 만난 조카는 병원에서 간병사 일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외로움을 달고 혼자 살던 조카는 걸핏하면 울었는데 가뭄에 비를 만난 풀잎처럼 생기가 돋았다. 딸린 식구가 없으니 병원에서 먹고 잠자곤 한단다. 얼마 전부터 전셋집으로 갈 궁리를 하면서 두둑한 통장을 손에 쥐고 잠자리에 든단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환자를 돌 볼 때는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개를 저었지만 참고 견디었다. 간병사 일이 어느 정도 숙달이 되었는데도 그쪽으로 시선을 주거나 의식하기가 싫었다. 그래도 똥 범벅인 그것만 보면 아이 고추 다독이듯 조심해서 닦아 준단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저귀를 풀어보니 그것이 꼿꼿이 서있더란다. 민망해서 고개를 돌린 채 닦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던 부인이 오더니 “워메, 꼬추가 섰다!” 큰소리를 지르며 남편의 그것을 보면서 한참을 울더니 손으로 다독이면서 “인제는 오래 살 것이여.” 볼을 부비며 하염없이 울더란다.

조카는 ‘그래, 나도 매운 고추처럼 살아왔지, 차가운 세월에도 빨간 고추가 썩지 않고 잘 견디듯이 나도 그 맵고 비참한 세월을 이겨냈지…’ 간병인으로서 보람을 처음으로 느꼈단다.

내 친정어머니, 환자의 부인이 그렇게 고추를 애지중지하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약력> 월간 ‘수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회원, 징검다리수필문학상 수상, ‘서석문학’ 수필작품상 수상, 징검다리 수필문학회장, 저서 수필집 ‘복조리’, ‘전설의 그림자 빛살 피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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