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3일(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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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최저임금
최형천
전남신용보증재단 이사장
경영학 박사

  • 입력날짜 : 2018. 06.24. 19:27
올해의 이상문학상에서는 손홍규 작가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라는 작품이 대상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은 모친상을 당한 청년과 동네 불한당 패거리가 술집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혼자 술을 마시던 청년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자 그 장면을 본 패거리들은 어찌 할 줄 몰라 애꿎은 소주병만 만지작거립니다. 그들은 아내나 자식들이 울 때도 소리치고 윽박지르고 비아냥거리며 살아왔기에 누군가를 위로하는 방법을 아예 몰랐습니다. 그들이 위로에 서툰 이유는 별로 위로받으며 살아오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처럼 우는 사람 앞에서 소리치고 윽박지르고 비아냥거리는 것이 그들 나름의 위로하는 방식인 탓도 있었습니다.

필자는 최근 우리사회의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이 소설의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최소한도의 임금수준을 보장하자는데 그것이 많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년에 비해 월 10여만 원 정도 더 올렸더니 그것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기업이 해외로 나갈 것처럼 모든 책임을 적은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논리구성을 보면서 섬뜩함이 느껴졌습니다. 생활비에 턱없이 못 미치는 임금으로 버텨내는 저소득층에게 위로는 하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막말 수준의 주장이 내적 여과 없이 뱉어지는 사회는 ‘위로할 줄 모르는 사회’ 입니다.

이들이 들이대는 통계 숫자는 저소득층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없어 먼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누구에게나 가장 귀한 것이 자신의 삶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 하더라도 타인의 삶을 소홀히 하게 되면 결국에는 자신의 삶도 위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이 최저 임금을 받는 처지에 있다면 그렇게 건조한 논리를 끌어낼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한 달만이라도 최저임금으로 살아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남에게 그렇게 쉽게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제도의 편익보다는 문제점만 부각시키는 태도입니다. 과연 최저임금제도가 저소득층에게 별 도움은 되지 않으면서 기업에게 부담만 주었을까요? 이제는 문제점만 나열할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특히 저소득층을 배제하는 그런 방식이 아닌 그들까지도 포용하는 건전한 대안을 합의하여 도출해야합니다. 말없는 다수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책대안을 숙의하여야합니다. 우리 사회가 적정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국가가 세금으로라도 저소득층을 보호하는 복지를 확충하는 것이 포용국가의 길입니다.

이제는 시민들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착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을 구별하고 대우를 달리해야 합니다. 식품의 품질을 이야기 할 때 재료의 함량이 미달하거나 질 나쁜 재료를 사용한 경우를 불량식품이라고 합니다. 종업원들에게 법률이 정한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 기업이라면 그 기업은 불량기업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어떤 제품은 가격이 저렴하나 알고 보니 종업원 임금을 깎아서 가격을 낮춘 것이라면 이것은 정당하지 못한 경쟁입니다. 앞으로는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는 착한기업 제품을 쓰고, 반대로 최저임금도 보장하지 못하는 기업 제품은 멀리해야 합니다.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기업의 상품을 구매하고, 가게를 찾아가는 착한 소비가 세상을 바꿉니다.

링컨은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이 개미를 죽이는 것을 보고 즉시 말렸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이 중요한 것만큼 개미에게는 개미의 생명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 링컨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들 중 가장 사소한 존재, 즉 아주 작고 말도 못하는 개미마저 동정했습니다. 이 소년이 자라서 노예해방 헌장에 서명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동물복지까지도 거론합니다. 하물며 사람에 대한 기본적 대우는 문명사회의 기초입니다.

손홍규 작가의 소설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들이 정신이 들어 둘러보니 청년은 가버리고 없었다. 그 청년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버린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자신의 노동으로 최소한의 생활도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기본적인 틀을 세우는데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시작은 따뜻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 아픔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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