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6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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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동서 해양무역의 교차점 ‘말라카’ (2)
동방의 사도들 ‘사비에르, 베르나도, 야지로’의 흔적을 찾아서…

  • 입력날짜 : 2018. 09.11. 18:40
말라카 시내에 위치한 ‘성 사비에르 교회’.
사비에르, 베르나도, 야지로!

일명 동방의 사도들이다. 최초로 중국과 일본을 방문한 기독교인다. 또한 최초의 한국인과 일본인 기독교인이다.

지금 나는 그분들의 흔적을 따라 여행하고 있다. 나가사키, 마카오, 고아, 말라카 등지의 그들 족적을 찾는 여행이다. 신앙심 없는 비신도로 단지 지적 욕망으로 찾아다니기에 ‘성지순례객’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 쓰지 않기로 했다.

이번 나의 말라카 여행에서도 그들의 채취를 느끼고 싶었다. 아니 그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갔다고 해도 될 것 같다. 500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그들의 흔적과 향기는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이번 말라카 여행이 지루하지 않고 즐거웠다.

▶ 말라카로 가는 길

말레이 반도!

아침 일찍 싱가포르에서 버스를 타고 말라카로 향했다. 시가지를 막 벗어나자 국경을 통과한다. 이제 막 부산하게 깨어나는 아침을 내다본다. 도로는 잘 정비됐고, 거리는 생각보다 깨끗하다. 야자수 가로수가 늘어선 도로가 운치가 있다. 말라카는 세월에 묻힌 신비한 옛 고대도시가 아니었다. 아직도 번창하는 도시였다. 외곽 여기저기 주택들이 들어서고 있다.

낮게 지어진 오래된 집들 사이로 열대초목이 우거져 있다. 옛날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바다가 꽤 먼 거린데 말이다. 거리의 풍경이 보통 동남아 도시와 다르다. 유럽식 건물이 많다. 문양도 예쁘고 색상도 화려하다.

▶ 사비에르, 동방선교를 떠나다

‘동방의 사도’로 불리는 ‘사비에르(Xavier·1506-1552)’!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한 사람이다.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선교사이기도 하다. 그는 1506년 4월7일 스페인 귀족가문에서 출생했다. 파리로 가서 신학대학에서 공부하고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다. 그는 27세에 예수회를 창립하고, 동방 선교에 뜻을 둔다.

드디어 1541년 4월7일 동방선교에 뜻을 두고 리스본을 떠나다. 도중에 ‘모잠비크’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듬해 1542년 5월6일 인도 ‘고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동남아와 중국 등 동방국가들에 대해 듣고 자료를 수집한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1545년 고아를 출발해 그해 9월 말라카에 상륙한다. 당시, 포르투갈 함대(무역선)는 이미 1509년 말라카에 거점을 마련하고 활발한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는 3년간 머무르면서 인도 남동부 해안의 가난한 어부들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했다. 1546년 향료의 섬인 ‘믈러카제도’까지 방문하기도 한다. 2만여명에게 세례를 줄 정도였다.

▶ ‘야지로’와 ‘베르나도’를 만나다

그는 말라카에서 상인들로부터 ‘일본’이란 나라를 알게 된다. 동시에 ‘포교하기 쉬운 나라’라는 것도 듣는다.

1547년 12월에는 운명적으로 말라카에서 일본인 ‘야지로’를 만난다. 그는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사람이었다. 역사책에는 ‘하지로’ 또는 ‘안제로’로도 나온다. 당시 그는 일본 ‘가고시마’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 직전에 포르투갈 상인(조르제 아르바레스)의 도움을 받아 탈출해 말라카로 와 있었다.

그에게서 일본인들은 인도인과 말레이인과는 차원이 다른 ‘문명인’이라는 말도 듣는다. 지식을 숭상하는 민족이라 했다.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쉬운 나라’일 것이라고 여겨다.

사비에르는 야지로가 재능이 있음을 알고, 기독교인으로 키운다. 1548년 3월 인도 ‘고아’로 데려간다. ‘성 바울 신학대학’에 입학시켜 기독교를 가르치고, 아울러 세례도 받게 한다. 일본 최초의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또한 그와 함께 일본어 성경번역본을 만든다.

당시에 야지로 말고도 일본인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역시 가고시마 출신의 ‘베르나도’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야지로와 함께 고아에서 신학공부하고 세례를 받은 후, 더 높은 수준의 공부를 하기 위해 포르투갈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포르투갈 신학대학에서 공부한 후 로마 교황청으로 가 당시 교황 바오로와 이그나시오 로욜라를 만나는 등 활발한 신앙 활동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1557년 포르투갈 ‘코임브라’에서 급사하고 만다. 그가 일본으로 함께 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그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추측되는 인물이다.
‘세인트 폴 교회’ 앞의 사비에르 신부의 석상.

한편으론 루벤스(1577-1640)가 그린 ‘한복을 입은 조선 남자’라는 그림의 주인공이라 여겨지고 있다. 그가 카톨릭 신자이면서 ‘안토니오 코레아’란 베니스의 거상으로 성장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 일본 가고시마에 도착

이후 이들은 일본을 향해 떠났다. ‘아반’이란 중국 무역선을 이용했다. 사비에르 신부는 프랑스인 수사 3명과 야지로가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은 중간 기착지 ‘야마가와’에 도착해 배를 바꿔 타고, ‘가고시마’로 향했다. 1549년 8월15일 드디어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했다.

그곳은 이미 1543년 포르투갈인이 왔던 곳이었다. 당시 포르투갈 무역선이 중국 가는 도중에 규슈 남단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했었다. 이때 일본에 화승총이 전해진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가고시마에 착륙 후 우선 야지로 집에 거점을 마련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청빈과 정결을 내세워 주민들의 환심도 샀다.

현지 실정에 맞춘 포교를 펼쳤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치구조를 파악하고는 영주들에게 접근해, 서양의 지도와 망원경 등을 바치며 지배계급들의 환심을 샀다. 당시 일본 귀족들 사이에는 외국 패션이 유행하고 있었다. 유럽풍 모자를 즐겨 썼던 것이 한 예다. 이런 유행은 사비에르 일행에게 도움이 됐다. 교토에서 10여일을 머물렀으나 천황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함께 2년3개월간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많은 천주교도들이 생겨났다. 오이타 성주를 교화시키는 등 큰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 포교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국만 개종시키면 일본의 유교와 불교는 자연히 개종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일본을 개종시키기 전에 먼저 중국을 개종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세인트 폴 교회 바닥에 사비에르 신부가 임시 매장됐던 곳. 그의 시신은 이곳에 9개월간 안치됐다가 인도의 고아로 옮겨졌다.

▶ 중국 도착과 함께 사망

사비에르는 1551년11월 일본을 떠난다. ‘듀알트 드 가마’의 선박을 타고 말라카로 돌아왔다. 이듬해 1552년 1월 고아로 간다. 그리고 중국행을 본격적으로 준비한다.

1552년 4월14일 고아를 출발, 중국 광동으로 향했다. 중국인 무역선 ‘성십자호(聖十字號)’을 이용했다. 8월에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30마일 떨어진 ‘상천도(上川島)’에 도착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외국인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 해금정책으로 대륙에 상륙할 수 없었다. 그는 뇌물을 주고라도 상륙하려고 했으나, 연이은 시도도 실패하고 만다. 아쉽게도 그는 그해 12월20일 열병으로 초막에서 타계했다. 당시 46세였다.

그의 시신은 임시 매장됐다가 이듬해(1553)에 말라카로 이장됐다. 당시 상인들에 의해 말라카로 옮겨오는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무더위 속에서도 한 달여 동안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라카에 지금도 그의 시신이 안치됐던 곳이 보존돼 있다. 말라카에 9개월간 안치했다가 다시 1554년에 고아로 옮겨 바실리카 지하에 안치돼 있다. 그가 쓰던 십자가도 함께 보존돼 있다. 신자들이 조금씩 조각으로 떼 내어가 지금은 유리관 속에 보관하고 있다.

▶그의 죽음, 선교의 길 열다

그가 묻혔던 자리와 도시에는 그의 이름이 붙은 성당들이 들어서 있다. 고아, 말라카, 상천도 등지가 그들이다. 말라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덜란드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산티아고 요새, 그분의 흔적과 향기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지붕은 무너지고 벽만 남은 ‘세인트 폴 교회’가 그것이다. 1521년 건축된 성당인데 이곳 지하에 신부님의 시신이 묻혔었다. 성당의 위치는 산티아고 요새의 꼭대기에 있다. 전망이 아주 좋다. 때문에 말라카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오르는 곳이다. 언덕 뒤는 묘지가 군데군데 조성돼 있다. 그 시절을 살다간 유럽인(관리, 상인, 성직자)의 묘비다. 성당 앞에는 사비에르 대리석 석상이 높이 세워져 있다. 주변 아래에는 네덜란드 시계탑, 스타듀이스(총독관저), 화물창고 등이 그것이다. 그야말로 인근이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

시내로 들어서면, 사비에르 이름이 붙은 성당이 있다. 1753년 세인트 폴 교회를 대체하기 위해 지은 교회다. 폴란드에서 분홍빛 벽돌을 가져와서 현지 홍토로 붙인 것이라 한다. 전장의 들보들은 한 그루의 나무에서 잘라낸 것으로 조립한 부분이 없을 정도로 컸다. 손으로 직접 만든 신도들의 좌석은 200년 전의 모습 그대로다. 성가대 뒤의 중앙 재단 위에는 광채가 나는 타일로 장식돼 있었다. 바닥에는 여전히 네덜란드 묘비가 누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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