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6일(화요일)
홈 >> 기획 > 문병채 박사의 신해양실크로드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동서 해양무역의 교차점 ‘말라카’ (3)
말라카에 숨어 있는 조선의 여인 ‘한여보’

  • 입력날짜 : 2018. 10.09. 19:08
말라카 술탄에게 시집 온 항리포(漢麗寶·한여보)가 사용했던 우물. 일명 ‘항리포 우물’이다.
말라카! 중국, 인도, 아랍, 서양 상인들을 유혹했던 도시다. 말라카로 향하는 도로가엔 팜 나무들이 늘어서 이방인을 반긴다. 남방국가 특유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빨간 색의 한자 간판들! 여기도 역시 중국 화교들 세력권임을 보여주고 있다. 앞바다에는 수많은 배들이 떠 있다. 옛 해양교통의 요충지다웠다. 옛 범선 모양의 해양박물관의 모습도 이채롭다. 예약한 호텔 앞에 선다는 버스를 일부러 탔는데…. 한 참 떨어진 곳에 내려준다. 한여름 불볕의 더위가 따갑다. 호텔까지 짐 가방을 끌고 가니 완전히 지쳐 버린다. 겨우 호텔을 찾아 앞에서 기다리던 말레이 친구를 만났다. 그의 차를 타니 살 것 같았다. 시내투어에 나섰다. 곧장 우리는 조선의 여자였던 ‘한여보’ 흔적을 찾아 ‘삼보산’으로 출발했다. 길은 오래되고 역사성 베인 건물들로 이어진다. 차로 10분쯤 가자 도착되었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 중국인의 애환이 깃든 ‘삼보산’

입구에는 기념품과 음식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번잡했다. 어느 관광지나 그렇듯 똑 같았다. 삼보산(三寶山)은 말라카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아니 ‘산’이라기보다는 ‘큰 구릉지’에 가깝다.

언덕은 생각 보다 크고 넓었다.

이곳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살았던 곳이다. 진정한 해양실크로드의 본거지다. 그래서 이 언덕을 ‘중국인의 언덕’(부킷 차이나)이라고도 부른다.

정화 원정대 이전부터 중국 상인들의 거주지였다고 한다. 고향 떠난 중국 상인들의 삶의 터전이고 뼈를 묻은 곳이다. 때문에 연중 중국인 탐방객이 모여든다고 한다.

길을 따라 산자락을 돌아서니, 우뚝 선 항일기념비(抗日紀念碑)가 보인다. 2차 대전 때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중국인 추모탑이다. 장개석(蔣介石)이 쓴 ‘충정족식’(忠貞足式)이란 네 글자의 비문이 있다.

또한, 이곳은 정화(鄭和)의 원정대도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만5천명에 이른 원정대를 이끌고, 이곳에 본진을 차리고 7차에 걸쳐 인도양과 아프리카까지 원정했다.

또한, 말라카 술탄에게 시집 온 명나라 공주도 이곳에 거주했다고 한다. 말레이 역사에는 “중국 명나라 항리포(漢麗寶)공주가 5백명의 시종들과 함께 와 만술샤 술탄(1456-1477)에게 시집 왔다”고 기록돼 있다.
2차 대전 때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중국인 항일의적비. 장개석이 쓴 충정족식(忠貞足式)이란 네 글자의 비문이 있다.

중국인들은 이곳을 거점 삼아 장사를 했고, 돌아갈 수 없다면 자식을 낳고 이곳에 묻혔다. 그들의 후예를 페라나칸(娘惹)이라 부르며, 이후 말레이 각지로 흩어져 살았다. 바바-논야(Baba-Nyonya) 가정의 시초도 여기서 기원했다. 현재 말라카, 페낭(檳城)과 싱가포르에 주로 살고 있다. 어쨌든 중국 상인들의 향수가 깃든 곳이다.

언덕길을 오르니 묘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현재 0.25㎢ 면적에 1만2천기의 묘가 있다고 한다. 비석만 있거나 집처럼 만들어 놓은 묘도 있었다. 말레이 중국인들의 공동묘지였다. 중국 외부 지역에서 가장 큰 중국인 묘지라고 한다.

▶ ‘말라카 역사가 담겨있는 ‘삼보정’

추모탑에서 좀 더 왼쪽으로 가자 삼보정(三寶井)이 보였다. 큰 우물이다. 현존하는 우물 중 말라카에서 제일 오래됐다고 한다.

정화 원정대가 팠던 7개 우물 중의 하나라고 한다. 정화는 말라카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왕국을 우대했다. 말라카에 머무르는 동안 원정대의 식수원으로 7개의 우물을 팠다. 지금은 3곳만 남아있고 그 중의 하나가 이 우물이다.

또한 말라카 술탄에게 시집 온 중국 공주인 항리포(漢麗寶, 한여보)가 사용했던 우물이다. 때문에 ‘항리포 우물’이라고도 한다.

우물 주변은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우리나라 보통 자연마을의 우물과 크기나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했다. 우물 위에는 철망이 덮혀 있었다. 아마 빠지지 말라고 안전을 고려한 것 같았다. 이 우물에 동전을 던져서 가라앉은 동전이 반짝거리면 다시 말라카에 오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나도 동전을 찾았으나 마침 하나도 없어 보고만 있자, 동행한 말레이 친구(바웨위)가 동전을 건네줬다. 둘러쳐진 관광객을 비집고 철망 사이로 넣었다. 어둠침침해 반짝이기는 “글렀다”싶어 애써 잊어버렸다.

1511년 포르투갈이 침입했을 때, 1606년 네덜란드가 침입했을 때 모두 이 우물에 독을 넣어 수많은 침략자를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795년 영국이 침입했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다. 깊은 우물 안에는 지금도 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수많은 동전들이 떨어져 있었다.
포산텡(寶山亭). ‘타향에서 죽어 묻힌 중국인’을 기리기 위해 1795년에 지어진 사당. 중국의 주요 정치가들이 말레이시아를 방문할 때 이곳을 참배한다. 한쪽에는 정화 원정과 관련된 특이한 ‘물고기(삼포) 신상’이 놓여 있다.

▶ 조선의 여인이었던 ‘한여보’

말라카의 6대 술탄이었던 ‘만수르 샤(Mansur Shah, 1459-1477)’는 명 황제의 딸 ‘항리포’(Hang Li Poh)를 5번째의 왕비로 맞았다고 한다. 당시 링호(Ling Ho)라는 사신이 항리포(漢麗寶) 공주를 인솔하고 왔다고 한다. 이후 공주는 파두카(Paduka)라는 아들을 낳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연대로 볼 때, 정화의 대원정 이후의 시기다. 당시 말라카가 중국의 힘을 빌려 북방에 있던 ‘아유타야(태국)’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그녀는 500명의 시종과 함께 왔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쪽 문헌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공주라고 했지만 실은 황실 궁녀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공주 대신 궁녀를 보냈던 사례들이 많이 있다. 궁녀 중 예쁜 여자를 뽑아 보냈는데, 공녀로 받쳐진 이웃나라 여성이 많이 선발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명나라와 관계 개선에 많이 힘써야 했던 조선에서 많은 공녀가 갔고, 그 공녀 중의 하나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레이 문헌이나 자료에 옥색치마 입은 일반 시종들과 다른 얼굴을 한 동양 여성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 등이 많이 보이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 죽은 자들의 추모 사당 ‘포산텡’

우물 바로 오른쪽에 포산텡(寶山亭)이 있었다. 낡은 대문에서 세월의 깊이가 느껴진다. 언뜻 보면 불교 사원처럼 보였으나, 도교 사원이었다. ‘타향에서 죽어 묻힌 중국인’을 기리기 위해 1795년에 지어진 사당이다. 향을 사르며 기원하는 중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연일 번잡하다고 한다.

사당 안으로 들어가니, 벽면에는 여러 도교의 신들이 모셔져 있다. 중앙제단에는 ‘대백공(大伯公)’이라는 역시 도교 신이 주신으로 모셔져 있었다. 또 다른 벽에는 이곳을 방문했던 주룽지, 강택민, 이붕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중국의 주요 정치가들이 말레이시아를 방문 할 때, 으레 이곳을 방문함을 알 수 있었다. 한쪽에는 특이한 ‘물고기 모양의 신상’이 놓여 있었다.

‘삼포’(SamPo)는 물고기였다. 사람들은 삼포공이라 불렀다. 삼포는 물기고의 이름이고 ‘공’(公)은 존칭이었다. 일명 ‘물고기를 모시는 사당!’ 즉, ‘삼포공 사당’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여기엔 재미있는 설화가 있었다. 정화가 폭풍우를 만나 배에 구멍이 나 침몰할 위기에 처했을 때, 물고기가 나타나 구멍을 막아줬다는 이야기다.

정화(鄭和)와 관련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이유가 이 설화인데, 역사적 증거는 없다. 다만, 대문 한 켠에 조그만 하게 ‘정화의 석상’이 모셔져 있었다. 초라했으나 유일한 정화의 흔적이었다.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많이본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