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8일(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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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동서 해양무역의 교차점 ‘말라카’ (4)
중국 명나라 해양 원정가 정화(鄭和)의 도시

  • 입력날짜 : 2018. 10.30. 18:26
말라카의 아름다운 야경.
정화(鄭和)의 도시, 말라카!
유서 깊은 항구다. 말레이시아의 작은 도시에 불과 한 곳이지만, 이곳을 역사 속에서 지칭하는 단어는 많았다. 세계문화유산, 해적도시, 해상실크로드 중심거점, 인도양과 태평양 연결점, 향신료무역, 아시아 최초의 유럽식민지(1511년),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번잡했던 포구 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중국 명나라 때 해양 원정가 ‘정화’(鄭和)에 의해 이뤄졌다. 지금도 그의 흔적과 유적은 대단하게 남아 있다.

필자는 말라카를 참 좋아한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간다. 한때 이 도시의 역사가 바로 말레이시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역사도시이기 때문이다. 해상실크로드에서 동서교역의 한 획을 그었지만, 지금은 작은 포구로 전락…. 가슴이 아프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 말라카의 번화가 ‘정화의 거리’

호텔(카사델리오)에 여장을 풀었다. 포구의 상징적인 곳에 위치해 있어 거처로 선택했다. 도보로 20여분 이내에 모든 유적들이 있어서 좋았고, 말라카 강의 옛 포구를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호텔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지도 한 장을 꺼내들고 ‘정화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먼저 해양박물관, 범선, 세관박물관을 둘러봤다. 이들은 붙어 있어 입장권 한 장으로 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말라카 앞 바다에 침몰한 포르투갈 범선 ‘플로라 데 라 마르 호’를 복원해 내부를 전시공간으로 꾸며놓았다. 옛날 약탈한 보물도 함께 실려 있었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바로 유람선 선착장과 연결됐다. 말라카 강이 시가지를 관통하고 있다. 유람선이 관광객을 태우고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유람선을 탔다. 양 옆의 집들이 곰팡이가 슬어 있다. 전통가옥도 보인다. 지상에서 1-2m 떨어져 지어져 있다. 꽃을 많이 기른다. 말레이시아 국화인 ‘하이브스커스’가 아름답다. 거의 1층은 카페, 위층은 여행객 숙소나 살림집으로 쓰인단다. 14세기 역사를 보는 것 같아 감동이 왔다.

리버 크루즈를 마치고, ‘정화문화관’으로 향했다. 말라카의 최대 번화가인 차이나타운(정화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정화의 거리’라 이름 붙여진 것부터 말라카에서 그의 위상을 알 수 있었다. 오후 6시부터는 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도로다. 큰 도매상들이 길 양 옆에 줄줄이 위치해 있다. 모두 말라카 최고의 부자들이란다. 80%가 화교들이다. 오랫동안 대를 이어 온 해상세력의 후예들이다. 도로변에 페라나칸 헤리티지 센타, 사찰, 종친회관 등 화교들의 집회소 같은 곳들도 많이 보인다.
해양박물관. 말라카 앞 바다에서 건져 올린 무역선을 사용해 만들었다.

▶ 정화의 흔적 ‘정화문화관과 챙훈텡사원’

정화문화원은 정화에 관한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자료에 놀랐다. ‘정화를 알려면 중국보다 말라카를 가 봐라’란 말이 허튼 말이 아님을 알았다. 이렇게 많은 자료가 남아 있고 보존돼 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당시 정화 함대의 모습도 모형선을 통해서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원정대가 갔단 항로와 항구, 그가 세워놓은 비석들도 모두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당시 각국이 중국 황제에게 진상한 각종 보물은 물론이고 동식물까지 알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보낸 기린과 얼룩말도 그림이 재미있었다.

머지 않는 곳에 ‘챙훈텡 사원’이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이라고 한다.

정화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1646년 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찰처럼 실내장식도 매우 화려했다. 부처가 모셔져 있다는 관광자료를 보고 왔는데…. 도교사원이었다. 관우가 주신이었고, 마조와 타이쉐이가 좌우에 모셔져 있었다. 참배객들이 너무 많아 들어설 틈이 없었다. 10여분을 부대끼며 노력했으나 내부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가짜 돈과 향을 태우는 데서 나오는 연기와 냄새로 도저히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 엄청난 규모였던 정화함대와 보물선

당시 정화 함대는 엄청난 규모였다. 흔히, 정화 함대와 콜럼버스 함대를 비교 한다. 정화 함대가 3천t 정도였는데, 산타마리아호는 200-250t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정화 함대에는 총 2만7천명이 타고 있었으며, 가장 큰 함선인 보선 60여척을 중심으로 100-200척 정도로 이뤄져 있다. 가장 큰 보선은 길이가 151.8m, 폭 61.6m, 대형 돛이 9개였고, 1천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의사도 180명이나 됐고, 놀랍게도 무희와 가수 수백명의 여성도 동승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산타마리아호는 함선 수도 3척, 승무원도 120명에 불과했다.

정화는 어떻게 2만1천명이나 되는 함대를 만들었을까? 관리를 위해 효율적이고 포괄적인 시스템이 필요했었다. 정화는 4개 체제로 운영했다. 함대에 중앙행정 함대를 두고, 그 밑에 선장이 최고 책임을 지게 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밑에 조력자, 선원, 승무원들이 있었다. 다양한 등급의 군 장교들에 의해 관리되는 이 ‘군사 및 방위 시스템’은 외부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가져왔다.

정화 함대의 귀중한 보물을 실은 ‘보물선’은 어떻게 생겼을까? 보물선은 외국 왕들이 중국 명나라 황제에게 보낸 보물들을 실어 나르는 배였다. 배의 내부구조는 4층의 창고가 있었다. 각 층은 계단으로 연결됐다. 방들은 장식돼 있고, 기둥은 아름답게 조각하고 칠했다. 바다에 떠 있는 한 채의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두 개의 아래 데크는 공물, 선물, 보물을 보관하는 데 사용됐다. 윗 갑판에는 작은 대포 16개가, 중앙 갑판의 양쪽에는 큰 대포 8개가 설치돼 있었다.
정화를 기념해 지은 챙훈텡 사원. 매일 참배객으로 붐빈다.

▶ 말라카 번영을 가져 온 ‘정화’(鄭和)

정화는 말라카왕국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정화는 말라카를 근거지로 해 남지나해와 인도양에서의 해상무역 기반을 닦았다. 말라카 왕국은 정화 덕분에 정치적인 안정을 꾀했다. 말라카해협의 해적들이 소탕됐을 뿐만 아니라 북쪽의 아유타야(태국) 왕국의 남침이 제어됐다. 말라카왕국은 정화 원정(1405) 이래로 중국의 보호 속에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충신한 조공국이 되고, 자주 명나라 군대의 도움을 요청했다. 1410년에는 말라카 왕이 그의 처자 및 신하 500여 명을 이끌고 명나라 황제를 방문하기도 했다. 중국과 우호관계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말라카에는 대규모의 중국 무역상들이 유입됐다. 오늘날 ‘중국인 언덕’(Bukit China)이 이때 조성됐다.

그렇다면, 정화(鄭和),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1371년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서역지방의 귀족이었고, 1070년 중국으로 이주해 왔다. 그의 집안은 원나라 때 운남성에서 벼슬을 했다. 10세 때 그의 조부모가 메카로 순례가기도 했다. 원을 멸망시킨 명나라가 지배하자 부친은 살해되고 그는 거세되고 내시가 됐다.

정화는 호탕한 기개와 우람한 체격을 가졌다. 제1차(1405-1407) 항해를 시작으로 7차에 걸쳐(1405-1433) 해양개척이 이루어졌다. 그는 콜럼버스(1492), 바스코 다 가마(1497) 보다 무려 80-90년이나 앞서 인도양을 항해했다. 유럽인들이 수탈에 있었던 것과 달리, 중국 황제의 위엄을 과시할 목적에 머물러 있었다. 정화는 또한 무슬림이었다. 그리고 당시 말라카 왕실은 무슬림이었다. 그래서 친근감이 훨씬 더했을 것이다.

▶ 말라카의 당시 사회상

말라카왕국을 구성한 종족은 ‘말라유 족’이다. 이들은 이미 기원전부터 말라카해협을 양안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이들은 순종적이고 적응력이 강했다. 때문에 그들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

말라카가 세계 속에 나타난 것은 이슬람 상인들이 내왕하면서부터다. 동남아에 이슬람교가 전파된 것은 7-8세기부터였으나,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은 1082년 세워진 무슬림 묘비다. 자바 섬의 동부에서 발견됐다. 그러나 무슬림 정권은 1297년경이었다. 파사이(Pasai)에서 발굴된 왕이 무덤이 아랍어로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15세기 말라카는 동남아에서 인도양으로 향하는 유일한 출구였다. 인도의 면직물, 말루쿠 제도의 향신료, 수마트라의 금과 후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티모르의 백단 등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중계무역 거점이었다. 당시 중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지에서 출발한 무역선과 유럽, 아랍, 인도 등지에서 출발한 무역선이 이곳에 입항해 교역했다.

말라카왕국은 특별행정기구를 두어 다양한 외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말라카 귀족들은 거래활동 관여하지 않고, 단지 입출항의 질서나 해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렇듯 말라카왕국의 해상무역은 1470년경 전성기를 맞았고, 제국(帝國) 형태로 발전됐다. 여기에는 툰페락(Tun Perak)이란 영웅이 있었다. 그는 거대한 재산가이며, 빈틈없는 정략가이자, 성실한 무슬림이었다. 그는 3대에 걸친 뛰어난 수완을 바탕으로 4명의 술탄을 모시며, 말라카왕국을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16세기부터 서양세력의 식민지로 전락해 갔다. 1509년 포르투갈 침입이 시작이었다. 이후 포르투갈은 132년간 지배했다. 1641년 네덜란드가 들어왔다. 이후 네덜란드는 183년간 지배했다. 1824년 영국이 들어왔다. 이후 영국은 120년간 지배했다. 당시의 ‘정화 대함대’의 모습은 정화문화관에 모형으로 재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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