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2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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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 새물내와 어머니 수필 최해자

  • 입력날짜 : 2018. 11.26. 18:17
봄 햇살이 살가운 날 집안 정리를 해보려고 장롱 문을 열었다. 다져져서 무거워진 목화솜이불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하지?” 이 이상 더 좋을 데 없는 순식물성 재질의 이불이건만, 지금 주거생활에는 활용도가 떨어진 장롱지킴이기에 어머니께 무한히 송구스럽다. 지난날 막내딸을 시집보내며 당신의 정성을 죄다 쏟아 부은 손끝을 묵혀두는 것만 같아서…….

“솜을 틀어서 다시 만들어 봐?” 결단을 내린다.

겉 호청을 뜯어내고 속싸개를 벗겨 냈다. 속싸개의 하얀빛이 말도 아니게 누리끼리해져 있다. 삶아 빨지 않고는 원래의 바탕색으로 되돌릴 방법이 없다. 넓고 큰 솥이 없어서 좁은 들통에 속청 한 장 한 장을 삶아내느라 거반 하루가 걸렸지만, 내 곁에 어머니가 와계신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속이 다 말끔할 정도로 개운하다. 손쉽게 적당량의 세제를 사용했으면 훨씬 간편한 일이었음에도 굳이 어머니의 빨래방식을 고집하는 딸의 마음을 어머니는 아실까! 해 지는 저녁에는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 속청을 담가 두고 낮 시간에는 아파트 담장에 걸쳐 널기를 반복한다. 천 조직이 촘촘한 광목주머니에 흰밥을 넣어 조물조물 밥풀을 풀어낸 다음 속청마다 풀을 먹여 볕에 내넌다. 반쯤 말랐을까 싶을 때에 정갈하게 개켜 발로 자근자근 밟아 구김살을 펴노라면, 어느새 새물내는 아지랑이처럼 흰 햇살을 머금고 울안가득 너울거린다.

새물내는 순 우리말이다. ‘새물’은 새로운 물건을 뜻하며 ‘내’는 냄새를 말한다. 그러므로 새물과 내는 합성어로써 특히 빨래를 해 막 입은 옷에서 풍기는 냄새를 일컫는다.

어머니는 가끔 그 새물내 나는 차림을 하고 외출을 서두르고는 했다. 친인척지간의 애경사 나들이가 주어진 날에는 으레 하얀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아침 일찍 빨래 줄에 걸쳐놓아 이슬을 머금게 했다. 촉촉해진 옷가지들을 벌건 숯불다리미로 다려 밀 때 아! 실안개처럼 코끝에 묻어나던 새물내는 어찌 그리도 달콤했던지……. 어머니의 외출은 나에게 아무런 까닭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에는 알록달록 꽃물이 번져들고는 했다.

어머니 침장솜씨는 정답도록 정갈했다. 대가족의 틈 없는 안주인 역할에 나이보다 앞서가는 어머니 외양이었지만, 그지없이 음전하신 어머니 덕분에 내 유년의 빛깔은 언제나 무지개 꽃빛이 된다. 희다거나 검다거나 쪽빛이거나 그 외, 여러 염색기법에도 능란한 어머니가 빚은 색동설빔을 입고, 처음으로 외가에 따라갔던 그 겨울의 추억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가도 잊힐 일이 없다.

자그마치 목화이불 세 채 분량의 솜을 솜 공장에서 틀어왔다. 지금의 주거환경에 알맞은 두께 감으로 얄팍한 차렵이불 예닐곱 채가 만들어졌다. 다소 번잡하기는 했으나 새 것 못지않은 가볍고 푹신한 이불을 쟁여두고 겨울을 기다림이 쏠쏠한 재미가 된다.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운 목화솜의 촉감은 요새 신 디자인으로 제작되어 시판되는 어떤 침구와도 비교할 수는 없다.

“여자의 삶은 오직 지극함이란다. 인생을 정성스럽게 살아야 돼.”라고 하신 어머니의 숨결과 손결이 잠포록이 피어난다. 고요히 번져드는 따스함이 좋아 마음은 어느새 들꽃 사그라진 논둑길에 다다라서고, 어린 나를 어여쁘게 꾸며주신 어머니 손잡고 외가에 다녀온 기억이 어제 같기만 하다. 생애동안 녹록찮았을 일감들 속에서 당신의 역사를 틈 없이 지으시며 물려주신 살림솜씨를 조금이나마 수행했다는 자부심을 응석처럼 고하고 싶은 날, 오늘 만큼은 천상에서 “그래 그렇게 알뜰히 살아야지.” 소박한 어머니의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여기에 계실 제 더 살갑게 이해해 드리지 못한 애틋함이야 눈물 같은 것이지만, 이즘엔 그리움으로 비치는 어머니의 유일한 외출복! 밥풀 빳빳이 먹인 옥양목 치마 끝에서 살랑이던 새물내가 자꾸만 맛보고 싶어진다.


<약력> ‘문학춘추’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PEN광주, 전남여류문학회, 광주문인협회, 장성문인협회, 문학춘추작가회 회원, 현 광주문인협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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