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2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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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향한 열망으로 그가 꿈꿨던 낙원은 현실에 대한 도피처
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폴 고갱

  • 입력날짜 : 2018. 12.06. 18:09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1897-1898)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영국 작가 윌리엄 서머셋 모옴이 폴 고갱의 삶을 모태로 쓴 소설 ‘달과 6펜스’의 한 부분이다.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40대 초반 남성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런던의 중산층 주식 중개인이다. 어느 정도의 부유함으로 별 걱정 없이 살아갈 환경이었지만 그는 예술을 꿈꾸며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파리에서 가난하지만 자족적인 화가로 살아간다.

‘달’과 ‘6펜스’가 상징하는 것. ‘이상’과 ‘현실’, 혹은 ‘예술’과 ‘돈’으로 대변될 수 있는 상반된 두 가지는 주인공의 혼란스런 삶을 상징한다. 소설의 소재가 된 폴 고갱의 삶에서도 ‘달’과 ‘6펜스’는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던 난제였다.

폴 고갱(1891)
서른다섯. 여느 화가들보다도 훨씬 늦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예술을 향한 열망은 그 누구보다도 들끓었을 나이였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삶도 예술가의 이상도 모두 저울질할 수 있는 나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삶 보단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택할 수 있는 용기의 이면엔 예술을 택한 무모함도 함께 있었다.

주식 중개인이란 평범한 직장인이 그저 취미로 그림을 그렸을 때, ‘예술’은 메마른 현실의 주변을 충만하게 감싸주는 유연제지만, 화가로 삶의 항로를 바꿔버린 순간 ‘예술’은 돌연 현실의 대척점에 존재하게 된다. 고갱도 화가를 선언한 이후 삶의 매순간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였으며, ‘예술’과 ‘현실’은 결코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이었다.

고갱의 유년시절도 그리 평범하진 않았다. 아버지 클로비 고갱은 프랑스 혁명기 시절 신문의 정치부 기자였고, 정치적 혼란기에 페루로 이주하려는 도중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고갱의 어머니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청소년이 된 고갱도 어머니를 돕기 위해 배를 타고 선원생활을 하기도 했다. 선원으로 인도에 있을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친구인 구스타브 아로자(작품수집가이자 예술가)가 고갱의 후견인이 된다.

고갱이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이후 고갱은 아로자의 소개로 증권거래소의 직원이 된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취미생활로 그림을 그렸다. 허나 그저 취미라 하기엔 고갱의 예술적 재능은 넘쳐흘렀다.

‘언제 결혼하니’ (1892)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했고 결국 고갱도 실직하게 됐지만, 그는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지 않고 과감하게 예술가의 삶으로 돌아섰다. 이미 인상주의의 전시회에 참가도 했었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도 꽤 높았던 터였다. 허나 고갱이 택한 예술가의 삶은 가난하고 척박한 삶이 아닌, 부와 명성을 거머쥔 탄탄대로의 예술가의 삶이었다.

스스로의 재능에 충분히 만족했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많은 이들이 공감해줄 것이라 믿었으며, 금새 작품도 잘 팔리고 인정받는 작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혹독한 현실은 다른 여느 화가와 마찬가지로 고갱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의 예술은 늘 한발 앞서나갔지만, 현실은 항상 예술의 한걸음 뒤에서 희미하게 따라올 뿐이었다.

파리에서 퐁타벤으로, 다시 파리로, 고흐와 함께였던 아를로, 다시 파리로, 원시의 섬 타히티로, 다시 파리로, 다시 타히티의 더 깊숙한 원시의 공간으로. 고갱은 수없는 방랑의 시간을 보냈다.

꼭 다시 파리로 돌아오고 싶어 했던 자아와, 갈수록 더 멀리 원시의 자연으로 들어가려는 자아는 수없이 반복됐다. 프랑스 북서부 근처에서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까지, 그리고 섬의 더 깊숙한 곳까지. 원시의 세계는 고갱에게 도피처이자 예술의 원천이 됐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1889-1890)
예술가로 인정받고 작품도 잘 팔리고, 댄디남 같은 멋진 화가로 살아가고픈 욕망은 늘 고갱의 마음 안에 자리했지만, 파리의 예술계는 그닥 고갱을 반기지 않았다.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며 기대했던 마음은 실망으로 되돌아왔고, 고갱을 더욱 더 원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했다. ‘타히티’는 현실의 삶을 벗어날 수 있는 또 다른 돌파구였고, 스스로에게 예술의 촉매제였다. 남들이 그리지 않았던 것, 인상주의가 추구하지 않았던 것, 당시 그 어떤 예술가도 주목하지 않았던 원시의 모습은 고갱에게 색다른 매력으로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찌 보면 원시의 섬이란 이상세계는 고갱에게 자신의 예술을 실현시킬 이상적 소재였다. 인상주의자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색채에 탐닉했으며, 신인상주의자들은 그 빛을 과학적으로 분석해나갔다. 고갱은 철저하게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 과학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은 상상의 세계, 상징의 세계는 그만의 예술세계를 채워나갔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색채와 표현을 채워갈수록 고갱만의 작품세계는 확고해졌지만 현실과의 멀어짐만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1897년, 첫째 딸이었던 앨런이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심신이 극도로 황폐해진 고갱은 자신의 역작이랄 수 있는 작품을 남기고 자살을 기도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림은 왼쪽에서부터 시작된다. 삶의 출발을 알리는 아기의 모습에서부터 백발의 머리를 움켜쥔 늙은 여인의 모습까지, 삶의 시작부터 종말을 보여주는 무수한 상징으로 가득 찬 그림이다. 화면 중앙의 과일을 따는 사람과 배경의 자연은 신앙의 상징이랄 수 있고, 생로병사로 갈음되는 인간의 모습과 음울한 청색조의 색채 등 화면을 가득 메운 상징들은 고갱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고갱은 그림을 완성하고 타히티의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 다량의 비소를 삼켰으나 지독한 구토만 되돌아왔다. 이후에도 고갱에겐 예술과 현실의 경계에서 끝나지 않은 사투는 계속됐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잡지에 글을 쓰기도 하고, 직접 출간하기도 했으며, 정치평론가로 신문에 글을 쓰고, 운하 건설 현장의 토목공으로 일하기도 하는 등 그림을 그리기 위한 갖은 일들을 다 감내했다.

그 수많은 직업들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가운데 기댈 곳은 스스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을까. 고갱의 자화상들은 다른 화가들의 자화상과는 사뭇 다르다. 고갱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그려내기도 하고,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이미지의 가운데 비장하게 그려내기도 한다.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그렸던 그의 작품세계는 ‘상징주의’라는 단어로 함축된다.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 원색조의 색채와 풍경들은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 본연의 원초적 모습을 생각해보게 한다.

그래서일까? 고갱의 대표작 ‘언제 결혼하니?’ 1892년 작품의 행적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이 작품은 2015년 약 3억 달러(약 3천300억원)에 스위스 바젤 사상 최고가로 중동 카타르 왕조의 셰이카 알 마야사 공주의 손으로 들어갔다. 최근 10여년간 미술계의 최고 실세랄 수 있는 그녀는 미술품 거래 가격에서도 속속 ‘최고’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2015년 이후 ‘언제 결혼하니?’ 작품의 거래과정에서 30%정도 싸게 거래되었고 역대 최고가가 아니라고 밝혀졌지만, 그래도 이 천문학적인 가늠할 수 없는 숫자는 고갱의 파란만장한 삶과 극렬하게 대비된다.

“나는 아직도 돈 문제로 걱정한다네. 언제쯤 돈 걱정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 샬로팽의 주문을 빨리 끝내야 할 텐데. 그래야 돈이 필요 없는 곳에 가서 살 수 있거든.” 1889, 고갱.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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