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8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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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전라도 문화와 연결된 ‘영파’ (1)
고대 한중 해상무역 거점 절강성 영파 ‘고려사관’을 가다
(寧波) (高麗使館)

  • 입력날짜 : 2018. 12.25. 18:41
중국 절강성 영파 시내에 위치한 당나라 시대 건설된 인공호수 ‘월호’의 모습.
지난달 27일, 광주에는 첫 눈이 내렸다는 말이 들려온다. 중국 절강성 영파는 한낮 온도가 18도에 육박했고, 쾌청하다. 날씨가 참 좋다.

영파는 송나라 때 명주(明州)라 불렀다. 명나라 때부터 영파로 고쳐 불렀다. 옛날 이곳은 우리나라와 일본과 무역을 활발히 했다. 특히 고대에 우리 호남지역과 가장 활발한 교역을 했던 곳이다. 실크로드의 해상거점이었던 것이다.
현재도 영파항은 부산항을 제치고 세계 4위의 물동량을 자랑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적인 교역 중심지였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 고대 실크로드 국제무역항 ‘영파’

송나라 시절 명주, 원나라 시대 경원, 명나라 이후 영파(寧波·영파)라 불렀다. 오래된 고대 실크로드 무역항이다.

당시 영파는 대운하와 바닷길이 만나는 물류 요충지였다. 항저우가 남송의 수도가 된 후 빠르게 성장했다. 천주(취안저우)와 광주(광저우)가 중계무역항으로 발전했다면, 영파(영파)는 생산과 유통이 결합된 국제무역항이었다. 주요 교역품으로 고려는 금·은·나전칠기·화문석·인삼 등을 수출했고, 비단·서적·도자기·약재 등을 수입했다고 한다.

삼국시대 주요 항로가 ‘충남 당진(당항포)-산동 봉주(등주)’였다면, 고려시대로 넘어 오면서 ‘개성의 벽란도-황저우의 명주’ 항로가 주 무대가 됏다.

한반도와 영파의 교류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시대에 이미 남조의 문화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의 것을 따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백제와 동진과의 교류는 웅진 천도 시기까지 모두 29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거나 받아들였다. 이중 동진과의 8회, 동진이 망한 이후 남조(송)과의 18회이다. 북위(北魏)와의 교섭도 3회 있었다. 동진의 인도 승 마라난타로부터 불교를 도입햇으며, 그 후 수많은 백제 승녀가 중국 유학을 다녀왔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교류가 더욱 활발했다. 816년 신라에 큰 기근이 발생하자 이곳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들어간 신라인이 170명이나 됐다고 한다. 이듬해 10월에는 신라에서 당에 사신으로 보낸 김장렴(金張廉) 일행이 표류 끝에 영파에 도착했다고 한다. 896연엔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이 입절사(入浙使)인 최예희(崔藝熙)를 따라 입당하다가 표류 끝에 영파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영파 인근 주산군도에는 중국 4대 불교 성지 중 하나인 관음신앙의 발상지인 보타산이 있다. 이곳 관음신앙은 그대로 신라로 유입됐다. 또한 장보고가 왕래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신라방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사관 모습. 인근에 관청과 시박사, 고려사관, 파사관 등이 위치해 있다.

고려시대 사료에 의하면, 962년 고려국 사신이 온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교류가 이어졌다. 1038년에는 명주상인 147명이 태운 무역선이 고려에 왔고, 1090년에는 고려 사신과 상인 269명을 태운 배가 명주에 도착했다. 1139년에는 한 해 동안 총 4차례나 명주 상인 327명이 고려에 왔다고 기록돼 있다. 1123년 서긍(徐兢)은 이곳을 출발해 6일 만에 소흑산도에 도착하고 서해 연안항로를 따라 북상해 벽란도에 입항했다. 심지어 일본으로 가다가 신안 앞바다에 좌초한 ‘신안선’도 출항지는 영파였다. 또한 최부(崔溥)가 표류했던 곳이기도 하다.

월호(月湖)에는 송나라 때 고려 사신이 묵었던 고려사관(高麗使館)이 설치돼 있었고, 1117년부터 1164년까지 고려사신 57차례, 송사신 30여 차례 왕래했다. 왕래 인원은 1차례 당 20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 영파의 중심지…아름다운 월호공원

기차역에서 10여분쯤 걸어가니, 아름다운 월호(月湖)가 눈에 들어온다. 당나라 시대 건설된 인공호수다. 춤을 추고 노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논다. 한 바퀴 도는데 족히 2-3시간은 걸리는 큰 호수다.

공원은 깨끗했다. 옛부터 문인과 선비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가는 곳 마다 풍광이 참 예쁘다. 잔잔한 호수와 수양버들이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사진으로 풍경을 담았다.

공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걸었다. 호수 주변을 따라 오래된 건물들이 여럿 보인다. 고대 해상실크로드의 항구 분위기다. 호수에 섬이 있고 멋진 옛 건물이 있다. 과거 유명 인사들의 별장, 서원, 서당으로 사용되다가 유적으로 남겨진 것들일 것이다.

건물 주위로 해자가 놓여 있다. 옛날 이 호수를 중심으로 고대 성곽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안에는 관청과 무역을 관장하는 시박사, 고려사신과 상인들의 숙소인 고려사관, 아라비아 상인들의 숙소인 파사관, 국제 무역거래소, 각종 상가 등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 보이는 것들은 그때의 것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일 것이다.
고려사관 내부 공간. 사신과 상인의 숙소뿐만 아니라 휴게소, 업무공간, 거래소, 화물창고 등을 갖추고 있다. 국가급 영빈관으로 사실상 오늘날의 대사관과 비슷했다.

▶ 고대 한중교류 산실 ‘고려사관’

먼저 고려사관을 찾았다. 월호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 앞에 고려사관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왼쪽에 비석이 서 있다. 고려사관을 설립하고 고려사신을 위한 선박을 건조하라는 송나라 황제의 명이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고려사관은 오래가지 못했다. 설립 13년 뒤, 금나라가 쳐들어와 불태워졌다. 그러나 한중간의 해상교류는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왔다.

담벼락에 그려진 커다란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고려와 송나라 양국의 사신과 상인들 교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멀리 고려에서 온 무역선, 명주항에 짐을 내리는 모습, 고려 사신단을 맞이하는 송나라 관리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려사관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사신과 상인의 숙소뿐만 아니라 휴게소, 업무공간, 거래소, 화물창고 등을 갖추고 있었다. 국가급 영빈관으로 사실상 오늘날의 대사관과 비슷했다. 영문도 ‘EMBASSY‘로 표시돼 있었다.

고려청(高麗廳) 건물이 핵심이었다. 안에는 접견실이 잇고, 벽에는 우리 옛 관복이 걸려 있었다. 옆의 ‘전시관’에는 유적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고, 발굴된 각종 고려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또한 고려와 남송간의 교류역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장보고의 흉상과 함께 그의 업적을 설명해 놓았다.

▶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난탕라오지’

근처의 ‘난탕라오지’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국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볼 수 있고, 전통음식까지 맛 볼 수 있어서였다. 옛 중국의 전통문화를 총체적으로 체험해 봄으로써 당시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리 중심에 우리에게 익숙한 동상이 들어왔다. 긴 수염과 건장한 체격에 청룡언월도를 든 삼국지의 관우 상이 있다. 전통 만두집 등 맛집과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거리에 ‘전통연극’이 공연되고 있어 문화체험 공간으로 안성맞춤이다. 옛 분위기 넘치는 거리는 운하를 끼고 양쪽에 민숙과 카페부터 식당, 기념품을 파는 상점까지 많은 가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부분이 아기자기한 것들…수공예품들이다.

어느 식당 앞에 절구에 뭔가를 찧고 있는 풍경이 어렸을 적 우리 동네 풍경이다. 항아리 속에 떡 같은걸 붙혀서 구워내기도 한다. 나무 뿌린인지 열대 과일인지, 삶는 건지 찌는건지…, 냄새가 고약하다.

저녁이 되니 홍등과 야경 분위기가 더해져 운치있는 옛 시가지로 변했다. 좁은 골목길! 중국 고전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풍경에 취했다. 빛 없는 인물사진은 별로라 밝은 곳만 보이면 남는 건 사진이라 생각하고 찰칵찰칵 찍어뒀다.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대도시보다는 소도시가 취향에 맞다. 색깔과 매력이 뚜렷한 소도시가 참 좋다.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시간이 멈춘듯한 곳들이 내 취향이다.

운하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도심 호텔로 들어갔다. 풍등이 빨갛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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