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0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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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밖 화가들] 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폴 세잔
사과 한 알에서 시작된 독창성…현대미술 위대한 첫 발을 딛다

  • 입력날짜 : 2019. 01.10. 18:16
폴 세잔 作 ‘사과와 오렌지’
20세기의 문이 열리고 몇 년이 지나지 않은 1906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세상은 새롭고도 빠르게 계속 변화해갔고, 화단의 혁명을 일으킨 인상주의의 태풍은 조용해졌지만 또 새로운 미술은 끊임없이 꿈틀댔다. 허나 급변하는 사회도, 미술계도 세잔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똑같이 그림과 사투하는 시간의 연장일 뿐, 늘 그래왔듯 작업실을 나와 화구를 챙겨들고 생빅투아르 산을 오르며 그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그려가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자신의 몸이었다. 비바람에도 뜨거운 햇볕에도, 살을 에는 추위에도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렸기에 몸은 점점 한계가 왔고, 늙어가는 몸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10월 하순, 결국 세잔은 그림을 그리다 의식을 잃었다. 그를 집으로 데려단 준 것은 다름 아닌 세탁물을 실어 나르는 초라한 배달마차였다. 몇 해가 지나도록 천천히 몸을 장악해오던 당뇨와 거기에 더해 폐렴까지 떠안은 몸은 결국 작은 숨소리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더 이상 그가 그려낸 그림은 볼 수 없었지만, 이미 충분히 ‘사과 하나로도 세상을 놀라게 한’ 대단한 화가임에는 틀림없었다.
화실에서의 세잔.

세잔에게 있어 ‘예술과 돈’을 생각해볼 때 어쩌면 ‘불행’이나 ‘가난’같은 단어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세잔의 아버지는 은행가였다. 은행을 설립할 정도로 부자인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사업으로 큰돈을 번 뒤, 프랑스 남부 엑상 프로방스에 은행을 설립했다. 재력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돈은 많지만 교양이 없는 사업가’인 자신과 달리 아들은 그 모든 것을 갖추길 바랐고, 아들이 법조인이 되길 원했다. 세잔도 아버지의 바람대로 공부를 곧잘 했다. 어린시절 언어와 문학 등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다. 중학시절엔 그와 깊은 인연이 된 ‘에밀 졸라’와도 친해졌다. 그때부터였을까, 졸라 덕분에 사과는 세잔에게 조금은 특별한 사물이 됐다. 아버지가 없고 병약했던 졸라는 곧잘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그때마다 덩치 큰 세잔은 그를 구해줬다. 졸라는 사과를 선물하며 고마움을 표했고, 성인이 돼서도 세잔에게 유년시절은 더없이 소중하게 간직된 기억으로 자리했다.

세잔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대학에서 법학과로 진학했지만, 도통 법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되려 그림이 점점 세잔의 마음 깊이 파고들었다.
폴 세잔 作 ‘생빅투아르산’

“은행가이신 우리 아버지는 자신의 책상 뒤에서 화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아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엄격한 아버지의 바람을 뒤로 하고 세잔은 자신의 의지를 더욱 굳혀갔다. 그림을 그리려는 세잔을 가장 반기는 사람은 친구인 졸라였으며, 결국 세잔을 파리로 입성시켰다. 예술이 아닌 돈을 택했더라면 아버지의 부를 기반으로 권세를 누렸으련만, 고집스런 청년 세잔에겐 예술의 길 하나였고,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세잔의 재능을 가장 먼저 인정하고 발견해 준 화가 피사로를 무척이나 따르고 열심히 그림을 그려갔다. 파리를 휩쓴 인상주의의 대열에 당당히 들어갈 거라 생각했지만 파리의 예술계는 철저하게 세잔을 외면했다. 세잔의 아버지 또한 그림을 택한 아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당시 인정받는 예술가가 되는 길이었던 에꼴 드 보자르의 합격과 살롱전에서의 수상을 간절히 바랬다. 허나 보자르와 살롱전도 세잔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고, 파리의 미술계는 세잔에게 싸늘하기만 했다. 제 아무리 부유한 아버지일지라도 번번이 실망스런 결과는 부자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게다가 모델이자 훗날 세잔의 부인이 된 마리 오르탕스 피케와의 동거까지 하며 아버지 몰래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렸다. 고집스러운 예술의 길에 한줄기 빛이라곤 어머니와 친구인 졸라, 그리고 몇몇 친분이 있었던 동료화가들의 도움뿐이었다. 아버지 몰래 보내주는 용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고, 아들인 폴을 아버지에게 보여주지도 못했다. 부와 출세를 저버리고 예술을 택했지만, 거듭 출품했던 전시회에서 주목도 받지 못하고 혹평만 쏟아졌을 뿐이었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친구 에밀 졸라와도 사이가 틀어졌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세잔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200만 프랑(약 25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유산이 쥐어진 것이다.
폴 세잔 作 ‘자화상’

돈이 아닌 예술을 택한 세잔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돈’ 걱정 없이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릴 수 있는 또 다른 생명력이 아니었을까. 아내와 아들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 세잔은 은둔자처럼 홀로 오로지 자신의 그림에만 몰두한다. 생빅투아르산을 그리기 위해 산의 언덕에 작업실을 짓고 끊임없이 산을 관찰하며 자연에 대한 탐구에 더욱 매달렸다. 세잔만의 번뜩이는 천재성을 알아본 화상 볼라르는 세잔의 작품을 모두 사들이고 전시를 준비했다. ‘프랑스 백년 회고전’, ‘독립미술전’등의 전시에서 점차 호평이 쏟아지며 당시 화가와 비평가들도 세잔의 그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화단의 호의적 태도와 아버지가 남겨준 어마어마한 유산에도 세잔의 관심은 줄곧 그림뿐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고 죽고, 세상도 끝없이 변화해가지만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자연의 본질 그것을 꼭 그려내고 싶었다. 매일같이 산을 관찰하고, 사과를 그리며, 아내와 다른 이들, 그리고 자신의 초상을 그리며 발견해낸 ‘형태의 신대륙’은 근대를 지나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온 원근법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모든 자연의 본질적 형태들을 그려냈다. 사과의 본질, 맛있게 한입 베어 물 수 있는 잘 익은 사과가 아닌 사과라는 본질이 그려졌다. 동그랗고 붉은 빛과 초록빛 노란빛 등을 가진 구체의 형인 사과 말이다. 그렇게 인류를 바꾼 세 번째 사과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는 새로운 눈을 제시했다. 이브의 사과와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 아무것도 아닌 사과 한 알에서 시작된 현대미술, 그가 그토록 그리고파했던 것은 세상 모든 것들의 본질적 모습들이었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예술과 돈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까지는 아니었고 돈에 궁핍하지도 않았지만, 세잔은 되려 ‘돈’의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오로지 예술의 길을 걸어갔다. 그의 예술적 집념과 노력은 훗날 프랑스인들의 ‘돈’에 새겨졌다. 생텍쥐베리(50프랑)와 드뷔시(20프랑), 구스타프 에펠(200프랑), 퀴리 부부부(500프랑), 그리고 세잔의 초상과 사과(100프랑)는 프랑스인들의 화폐로 다시 한번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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