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2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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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 ‘백의천사’ 길을 가는 딸 수필 이민주

  • 입력날짜 : 2019. 02.11. 19:07
창가에 넘실대는 구월 햇살이 무척이나 밝다. 방안의 짙은 갈색 커튼을 내린다. 병원 나이트를 하고 아침이 돼서야 돌아온 딸은 밥숟갈을 놓자마자 침대에 눕는다. 잠든 딸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창백하게 누워 있는 딸은 잠을 자고 있다기보다는 혼절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목까지 길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주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딸애는 백의 천사의 길을 걷는 햇병아리 병원 간호사다. 나이팅게일이나 “닥터지바고”속의 나나같은 막연한 간호사만을 생각했던 내게 우리 아이는 간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들고 아름다운 일을 하는가를 몸소 알게 해주었다. 집에서는 걸레도 빨아보지 않던 애가 중환자실에서 밤샘하며 환자들의 오물을 받아내고 인간의 귀한 목숨이 사위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 있었다.

“엄마는 모르지? 사람의 마지막 목숨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밤샘 간호하며 지켜보던 생명이 꽃잎처럼 하르르 져버린 날, 벌겋게 충혈 된 눈을 비비며 딸이 던진 말이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웬만한 슬픈 감정은 혼자서 꿀꺽 삼켜버리고 좀처럼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는 아이인데.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스무 살이 넘은 딸애를 꼭 껴안았다. 인형처럼 작고 가냘픈 체구가 가슴에 가득 안겨왔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딸애의 말이 아니라도 마음이 울적해질 때면 늘 내게 묻곤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소멸되어 간다. 소멸한다는 것은 이별을 뜻한다. 이별처럼 슬픈 일이 있을까. 낙엽 지듯이 생명이 진다는 것.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딸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볼에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다. 길가에 수북하게 쌓인 은행잎을 밟는 날이 곧 돌아오리. 인간의 유한한 삶을 생각할 때마다 한편으론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세상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 있는 자체가 예쁘고 사랑스러운 일 아닌가.

딸애가 삶은 아름다움이요 기쁨과 희망이라는 말 대신 아픔과 절망을 먼저 배워 버렸다면 어쩌나. 향수 대신 크레졸 냄새에 길들여 살아야 할 딸의 숙명이 애잔하다. 아무래도 여리고 가냘픈 몸매에 3 교대 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다. 밤을 새우며 일한다는 게 목숨 갉아먹는 일 아닌가.

가을이라서 그런가? 마음이 예민해진다.

잘못하여 의사에게 꾸중이나 듣지 않는지 환자의 혈관을 잘못 짚어서 당황하고 때론 성질 급한 환자에게 혼쭐은 안 나는지 걱정이 앞선다.

“딸은 잘 해낼 거야.”

애써 위로의 말을 던져본다.

잠든 딸애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 얼굴을 찡그린다. 꿈속에서 뭘 본 걸까.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라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요령을 피우지 못한 성격이라 살아가는데 많이 힘들 것이다. 그게 간호사의 길을 가는데 적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편으론 위로가 된다. 따지고 보면 힘든 만큼 보람도 있지 않을까. 생명을 보살피고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일에 정성을 쏟는 것은 참 귀하고 성스러운 일이다. 딸의 손길을 받은 환자들의 건강이 꽃처럼 피어났으면 좋겠다.

삶의 나락에 떨어져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는 환자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는 밤하늘의 별빛 같은 간호사가 되기를 기도해 본다.


<약력>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한국여성문학상, 동서커피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소설집 ‘종이꽃’, ‘광주문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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