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0일(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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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떠오른 시상에 과다하여 잠겼답니다
장희구 박사 漢詩 향기품은 번안시조 (315)

  • 입력날짜 : 2019. 04.09. 18:56
次李擇之韻(차이택지운)
읍취헌 박은

국화에 달빛이 어리어 비추고
맑고 순박하여 더럽지 않았는데
밤새워 시상 잠기어 잠 못 들어 하노라.
菊花渾被月 淸純自無邪
국화혼피월 청순자무사
終夜不能寢 解添詩課多
종야불능침 해첨시과다


사대부들 문화는 누정이 중심이었다. 흥얼거리는 가운데 운자를 냈고, 그 운자에 따라 나이 연만한 어른이나 시상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 ‘원운시’(原韻詩) 한 조각을 털어 내놓는다. 누정에 앉았던 선비들이 이 글을 듣거나 돌려 읽고 다음 시를 지었으니 이것이 ‘차운시’(次韻詩)다. 원운과 차운시를 통해 주고 받은 일은 생활화됐다. ‘국화가 달빛에 어리어 멀리 비추고 있고, 그 고운 빛 맑고 순박하여 더럽히지 않았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하염없이 떠오른 시상에 과다하여 잠겼답니다’(次李擇之韻)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읍취헌(邑翠軒) 박은(朴誾·1479-1504)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다. 읍취헌은 15세에 이르러서는 문장에 능통했으며,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용개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한다. 17세에 진사가 됐고, 1496년(연산군 2) 18세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던 총명한 인물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국화가 달빛에 어리어 멀리 비추고 있고 / 그 고운 빛 맑고 순박하여 더럽히지 않았네 // (눈에 아른거려) 밤새도록 차마 잠을 이루지 못하고 / 하염없이 떠오른 시상이 과다하여 잠겼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이택지의 운을 차운하며]로 번역된다. 이택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시인과는 가깝게 지낸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시인 앉아 한 쪽은 원운에 의하고, 다른 한 쪽은 차운했던 모양이다. 운자는 [邪]와 [多]였으며, 시상은 국화를 보면서 차마 잠 못 이루는 밤이 됐음으로 이끌어 냈다. 두 시인이 같은 시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계절은 소소한 가을이었던 모양이다. 시인은 국화가 순박하여 더럽히지 않는 순박함 속에서 자기를 비춰보는 겸허한 시간 속에 깊은 시심을 묻으면서 시를 끌어안은 시간을 가졌겠다. 국화를 향하여 달빛이 어리어 비추고 있으니, 그 맑고 순박함을 더럽지 않았다고 했다. 국화처럼 그렇게 자기를 투영하는 선경의 시통주머니는 늘 채워져 있어서 열어 보였다.

화자는 국화를 바라보면서 잠까지 못 이루면서 깊은 시상에 잠겼음을 열어 보인다. 국화가 눈에 아른거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떠오른 시상에 잠겨 있었다는 시심 주머니다. 시인은 국화 한 송이를 보고 시심이란 이렇게 열어 보이는 것이란 본보기를 보이며 자신을 투영시키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한자와 어구

菊花: 국화. 渾: 어리다. 被月: 비추다. 달의 힘에 의지하다. 淸純: 맑고 순박하다. 自無邪: 절로 사특하지 않다. // 終夜: 밤새도록. 不能寢: 능히 잠을 자지 못하다. 解添: 더하여 풀다. 잠기다. 詩課多: 시가 과다하다. 많은 시를 생각하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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