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6일(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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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무서운 고문 ‘보안부대’ 끔찍”
[5·18 진실 찾는 사람들]<6> 송희성 평화협정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대표
“마스크 시민군에 나눠줬다는 이유로 끌려가 구타
전신경련과 심장마비로 의식 잃어…후회는 없다”

  • 입력날짜 : 2019. 05.15. 19:29
송희성 평화협정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대표
“광주를 폭동의 도시로 조작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을 잡아가 가혹한 구타와 고문을 일삼았어요. 내란죄로 엮기 위해서였죠. 39년 전 고문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손이 떨리고 좀처럼 공포가 쉽게 잊혀 지지 않네요.”

39년 전 505보안부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던 송희성씨는 그날의 기억을 쉽게 잊지 못했다.

송씨는 “심한 구타와 가혹행위로 시민들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던 505보안부대는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았다”며 “그때의 후유증으로 온몸이 아프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등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했다.

현재 옛 터로만 남은 505보안부대는 광주민중항쟁 진압작전의 실질적인 지휘본부였고, 가장 잔인한 살상이 벌어진 곳이었다. 5·18 당시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 시민군 등을 체포해 지하 감옥에 감금하고 고문 수사를 자행했으며, 송씨 역시 이곳을 피해가지 못했다.

80년 5월 당시 YWCA 이사장을 맡았던 그는 10일간 이어진 항쟁 기간 시민군을 도와 많은 행적을 남겼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 민중들과 함께 ‘독재타도’를 외쳤고, 광주의 진실을 알기기 위해 대자보를 작성하기도 했다. 또한 부녀회원들과 함께 주먹밥과 검은 리본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집단사격이 있던 21일에는 적십자 병원에서 헌혈 작업, 27일엔 사체수습에도 나섰다.

송씨는 “그때 광주 시민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가 자발적으로 협동해 대동정신으로 광주 공동체가 하나로 뭉쳤다”며 “이런 일을 한 내가 마치 여성시민군이라 생각해 민주화를 싸우는 전사처럼 활동했다”고 밝혔다.

그러던 어느 날 송씨는 수사관들에 연행 당해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80년 6월27일 자정 지하실로 연행된 그의 죄목은 자신의 집에서 만든 마스크를 시민군과 기동타격대에 나눠줬다는 이유다.

송씨는 “사체를 수습할 당시 날씨가 더운지라 냄새가 심히 역해 마스크와 장갑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24일 자신의 집에서 부녀 회원들과 함께 마스크 100개와 장갑 50켤레를 만들어 제공했고, 무덕관 사체 수습에서 쓰고 남은 마스크를 기동타격대들이 사용했다”고 기억했다.

또 지하실에서 문초를 당할 때 “네가 동학혁명 때처럼 밀고 올라가자고 했다”면서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말했다. 5월25일 오후 2시께 강원대학교 학생이라고 한 예비군복 차림의 청년에게 했던 말이 심문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송씨는 “그 청년이 배고프다 하기에 집에서 차린 밥을 경비실에서 먹게 했고, 대화 도중 ‘이런 일은 동족상잔이고 양민학살이다. 어찌 우리가 키운 군인들이 우리를 죽일 수 있느냐. 동학혁명처럼 서울로 밀고 올라가자’고 한 얘기가 수사관 입에서 나왔다”며 “그 청년이 첩보원이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말했다.

지하실에서 심한 고문과 밤낮 없이 심문을 당한 그는 결국 그해 7월8일 새벽 전신경련과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다행히 수사관들이 인공호흡을 시켜 국군 통합병원으로 이송돼 목숨은 부지했다. 하지만 보안대는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정신고찰’이라는 병명을 붙였다.

송씨는 “그날의 고문 후유증으로 심장약부터 두통약, 골반약, 진통제가 섞인 약을 한 주먹씩 먹고 있다”면서 “고문으로 남은 상처로 인해 공동목욕탕에 가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보훈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송씨는 내 인생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애국운동이었고 한다. 그날의 일로 남편(노희관 전남대 명예교수)와 함께 부부 구속자가 되고, 육체는 망가져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으나 절대 후회는 없다는 것이다.

송씨는 “당시 505보안부대는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학생반, 교수반, 재야반으로 나눠 내란죄로 엮었고, 나 또한 재야반에 속해 여성간첩으로 몰아갔다”며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보안대에서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호소했다.

그는 이어 “지금까지 505보안부대 얘기만 들으면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려 힘들지만, 39년 전 금남로의 함성을 기억할 때면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벅차 오른다”면서 “피로 물든 광주의 역사는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만일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여성 시민군으로 태어나 민주주의를 위해 또다시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최환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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