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8일(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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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의 일본 작가 비평] (3) 한국에서 바라본 마쓰다 도키코
마쓰다 도키코는 조선인을 어떻게 그렸나(1)

  • 입력날짜 : 2019. 07.18. 18:10
조선인 징용자들이 처음 하나오카 지역에 하차한 곳(오다테시역).
국경과 신분 초월한 시점 견지

마쓰다 도키코 정도로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용자를 주시한 작가는 그다지 없을 것이다. 그가 조선인 징용자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조선인의 내면 그리기에 충실했다는 근거다.

아키타현 지사가 후생성에 보고한 바(1946년)에 따르면 아키타현 전역의 사업장에는 6천859명의 조선인이 명부에 이름을 새겼다. 그중 도와(同和)광업 하나오카 광업소 1천978명, 가시마구미 하나오카출장소 130명 등 총 2천108명의 조선인이 명부에 본적과 생년월일 등을 수록했다고 한다(차타니 주로크 ‘나나쓰다테 갱 함몰 재해 보고서’, 한일민족문제연구 26권, 2014년). 그러므로 마쓰다는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인들의 일상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더욱이 조선인 징용이 본격화하기 전부터 고임금 일자리를 찾아 하나오카 광산에 발을 들인 뒤 힘겹게 생활하는 조선인을 목도하며 성장한 마쓰다이기에 그들의 희노애락의 사연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리라….

그럼 마쓰다는 조선인을 어떻게 그렸는지,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마쓰다는 하나오카 지역에서 노동하는 조선인 광부를 국경과 신분을 초월해 일본인 노동자와 동등한 시점에서 바라봤다.
작가의 집필노트 ‘땅밑의 사람들’

당시 식민지에서 온 조선인을 보는 눈은 어땠을까? 마쓰다는 나나쓰다테 사건, 나아가 하나오카 사건의 배경과 내막을 실감나게 묘사한 ‘땅밑의 사람들’의 도입부에 조선인에 대한 관심을 거둘 것을 외동딸 도쿠코에게 강요하는 어머니를 등장시킨다.

그녀의 어머니는 “너, 엉덩이 흔들며 붙어 다니는 건 아니겠지? (중략) 하여간에 임씨는 조선인이다. 그렇지 않아도 경계들이 그들을 적색분자라고 말하는 터에…. 조선인과 실수라도 해봐라. 출세에 평생 방해가 되니까”라고 딸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이는 광산의 세계에서도 당시 조선인과 이성교제를 금기시한 사회적 분위기를 잘 반영한 내용이다. 광산 노동자인 딸의 거동을 그녀의 신상에 드리워질지도 모르는 불행의 씨앗으로 여기는 그녀 어머니의 걱정스런 눈빛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광산에서 만난 임씨에게 반해버린 그녀의 심경을 마쓰다는 “임씨를 만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의 불안이나 슬픔과는 별도로 도쿠코의 가슴이 뛰었다. 임씨…”라고 묘사했다. 일제강점기에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조선인과 일본인 남녀의 사랑을 사회적 통념에 맞서는 형태로 담담히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하키기 호세이라는 작가에게도 콜로리얼리즘의 경계를 뛰어넘는 시도가 있었음을 상기한다. 그 또한 1992년에 발표한 ‘해협’(신초샤)을 통해 식민지 시절의 조선인과 일본인 남녀의 사랑을 아름다운 해변의 배경과 함께 순수한 인간애의 장면으로 승화시켰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징용자들을 학대한 야마모토 산지가 4선 연임을 노리며 시장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징용 피해자들의 묘비가 있는 폐석더미를 없애고 기업을 유치하려 한다는 소식(역사 지우기)을 듣고 47년 만에 해협을 건너는 주인공 하시근.

그는 일본인 여성(사토 치즈)과의 밀애로 낳은 아들(사토 도키로)에게 도움을 청해 야마모토 산지의 부정에 맞선다. 스토리는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 공고한 콜로리얼리즘의 구도를 어떻게 타파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으로 호세이는 1993년 요시카와 에이지상을 수상했다. 출간 이후 쇄를 거듭하며 일본에서 읽히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의 한일관계에 비추어 아이러니한 현상이라는 해석도 나올 법하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한일남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보면 마쓰다와 하하키기가 그린 내용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도 있다. 허나 마쓰다의 시점은 성큼 한 발 더 나아간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노동자인 한, 광부인 한 생사를 같이한다’, ‘일본인도 조선인도 중국인도 미국인도 노동자인 한…’하고 역설하니 말이다. 성별과 연령을 뛰어넘어 자본권력에 맞서 계급의 연대를 강조한 곳에서 마쓰다의 의도를 확인 할 수 있다.
조선인 희생자 조혼비가 있는 신쇼지 전경.

투쟁하는 조선인 모습 리얼하게 그려

두 번째 특징으로 마쓰다 도키코가 일본제국주의와 그 하수인에 저항하며 투쟁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린 점을 거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투쟁 또한 그녀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땅밑의 사람들’에서는 한일 노동자가 연대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에 더욱 눈길을 끈다.

회사(도와광업) 측에서 증산 작업의 차질을 우려해 한일 노동자의 구출작업을 중지하고 나나쓰다테 갱도 폐쇄 작업을 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한일 노동자들은 회사에 증오심을 불태우며 대들 수단을 강구했다. 그 수단은 일본인 노동자 사다키치에 의해 “당신들은 무작정 이 갱을 폐쇄할 셈이지만 부모형제와 자식을 묻은 우리에겐 여기가 어떤 곳인지 그 마음을 알고나 그런 겁니까?”라는 격렬한 항의로 표현된다.

하지만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일 노동자는 경계의 눈을 피해 등과 팔꿈치로 툭 치며 ‘소통 행위’를 시도한다. 그리고 사다키치는 회사 측의 하수인인 니무라의 숨통을 조르며 제압한다.

그러한 투쟁의 양상은 한 클럽의 룸에서 제국주의 하수인들이 피로연을 즐기고 있을 때 더욱 격렬해진다. 가시마구미(가시마건설)의 고노 소장과 이세 하나오카 경찰서장, 광산장 이와부치를 비롯해 과장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그 자리를 향한 조선인들의 투쟁 수단은 다름 아닌 돌팔매. 그 돌팔매가 나나쓰다테 희생자들에 대한 복수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마쓰다는 그 장면을 “클럽 담에 돌멩이가 후두둑 튀는 소리가 났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이와부치 광산장이 “돌멩이를 꽉 쥐고 어둠 속에서 둔한 호흡을 가쁘게 쉬며 시선을 모아 던지는 광부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을 새긴다. 일부러 주석을 달아 “이 지역에는 원한을 갖거나 저주하는 상대에게 직접 복수하는 대신 한밤을 틈타 상대의 집에 돌멩이를 던지는 ‘돌치기’ 관습이 있었다”라고 설명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땅밑의 사람들’이 소설이라고는 하나 현장조사와 현지인의 증언,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쓰인 만큼 그 설명으로 보아 그러한 관습이 있었을 터. 하지만 당시 조선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돌팔매질을 하면서 투쟁했는지에 대해 상세히 밝혀진 바는 없다. 조선인들이 하나오카 지역에서 돌팔매로 회사 측에 저항했는지 사실 여부를 조사해볼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땅밑의 사람들’에서 조선인들이 투쟁의 빛을 발하는 클라이막스는 신년 배급주를 빼돌린 회사 측 하수인들에게 복수하는 장면이다. 일본인 노동자와 함께 조선인들이 합숙소로 쳐들어가 일본인 하수인 20여명을 직접 제압하기 때문이다.

마쓰다는 그 장면을 “객실로 뛰어든 일본인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들은 마침내 경계 대부분을 앞쪽 출구와 뒤쪽 출구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눈 위로 쓸어냈다. 술 냄새를 풍기고 숨을 몰아쉬며 저항하는 후지타니와 다구치와 그 외의 사람을 임씨와 사다키치, 하시모토와 정씨 등 30명 정도의 일본, 조선 노동자가 제압했다”고 썼다.

실제 투쟁 기록 새롭게 밝혀져

실제로 조선인들이 당시 투쟁한 상황에 대해서 마쓰다 도키코는 하나오카 사건 현장탐방보고서 ‘하나오카 사건 회고문’에 ‘조선인의 경우―일본인 경계를 적발―’이라는 소제목을 달아 기록했다.

“밥은 일일이 저울에 달아 그릇에 담았다. 된장국에다 단무지가 나왔고 된장국은 내용물이 거의 파였다. 물을 많이 넣으니 저울에 단 밥은 무거워졌으며 그 만큼 쌀의 양이 줄어서 ‘물을 넣지 말라’고 항의했다. 또한 배급주를 속여 다른 곳에서 진탕 마시고 소란 떠는 경계들을 모두가 적발한 적도 있었다.”

이 증언으로 보아 작가가 ‘땅밑의 사람들’에 픽션적 요소를 가미했다고 하더라도 조선인들이 배급주를 빼돌린 일본인을 적발한 것은 팩트임이 분명하다. 1951년 조각가와 시인 등이 현지인들의 증언을 얻어 완성한 시와 판화(하나오카 이야기)에도 한일 노동자가 연대하고 조선인들이 투쟁한 내용이 등장한다(‘韓日 노동자 생매장 사건 한일연대, 시·판화로 밝혀져’, 광주매일신문, 2019년 5월 3일자 참조).

그러므로 1955년 1월11일 도와광업의 모리타 도라오 상무와 하타자와 교이치 총무부장이 외무성을 방문해 제시한 ‘나나쓰다테 갱도 함몰 재해 보고서’를 외무성 아시아국 제5과에서 정리한 내용(하나오카 광산 조선인사건에 관한 자료 제공의 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최근 하나오카 거주 조선인 25명이 본건에 대해 이의를 제기, 회사에 자신들의 고용을 요구하고, 현재의 임금에 준해 수정해서 당시 임금을 지불하라는 등의 무법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최근 지역 경찰에게서 연락받은 사항인데, 왠 조선인 단체가 본건에 대해 1월 중 외무성, 한국대표부 등에 진정할 계획이라는 정보가 있다”는 문구가 있다(차타니 씨 제공)
김정훈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전남과학대 교수>

이는 10여년 이후(1955년)에도 사건이 미해결 상태였음을 시사한다. 회사 측의 부당한 대우도 여전해서 조선인들이 회사 측에 임금 문제와 나나쓰다테 사건에 대해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는 증거다.

마쓰다 도키코는 ‘땅밑의 사람들’(1953년)을 세카이(세계)문화사에서 간행한 후에도 유체 발굴 문제 등 미해결 현안을 염두에 두고 1972년에 ‘하나오카 사건 회고문’을 ‘일중우호신문’에 연재했다. 그 후에도 줄곧 사건의 진상규명에 매진했다. 또한 모든 이에게 전쟁과 과거의 불행을 반복하지 말 것을 강력히 호소했다.

피해자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배상, 위령비 설치,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역사교육의 실천이 중요한데 그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쓰다의 평화정신과 자성이 한일관계에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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