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4일(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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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 약 속 조자영 수필

  • 입력날짜 : 2019. 08.12. 18:22
연잎 위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투닥, 투다닥, 잠든 연잎을 깨우는 비. 점차 늘어나는 빗소리는 한 무리의 발걸음 소리처럼 다가오고 바람은 어느새 내 기억의 갈피를 넘겨 그날로 데려간다.

대학 새내기였던 90년대 초, 운동권이 대학 학생회를 주름잡던 때였다. 신입생 환영회를 주도한 건 단연 운동권 선배들이었다. 유난히 잘 해주던 J선배, 그는 시위대의 선봉인 녹두대였다. 국방색 바지를 즐겨 입던 그, 잔디밭에 누워 볕바라기를 즐기던 그는 붙들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마치 돋을볕처럼 나를 설레게 했고 어느새 홀린 듯 나는 그 볕에 섞이어 가고 있었다. 내가 속한 두 번째 집회가 있던 5월의 어느 날, 가지 않겠다던 내게 잘 지켜주겠노라 결연히 다짐하던 J를 따라 도청 부근의 집결장소로 갔다.

이미 정보를 입수한 전투경찰이 우리 주변을 에워쌌고 선창에 따라 제창하는 결의에 찬 구호 몇 마디에 나는 벌써 투사가 되어 있었다. 어느덧 시위 행렬은 도청을 향하고 있었고 막아 세우려는 전경들과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누군가 “나가자.”를 외쳤고 행렬은 인간 띠를 한 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전진해 나갔다.

그 순간 ‘펑 따다다다다….’ 일제히 최루탄이 터지며 인간 띠는 줄이 끊어진 염주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차량이 통제된 6차선 도로는 여기저기서 터지는 아우성과 함께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풍랑에 휩쓸려 위태로운 일엽편주(一葉片舟). 공포에 질려 J를 찾아보려 했지만,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달리기가 서툰 나는 그만 무리에서 도태되었고 뒤쪽에서 치고 온 전경들의 방패와 수백 개의 군홧발이 패잔병인 나를 짓뭉개고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슴푸레 멀어지는 군홧발의 진동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지럽게 널린 화염병의 유리 파편과 주인 잃은 신발 몇 짝, 채 가시지 않은 희뿌연 연기만이 그곳이 전쟁터임을 알게 했다.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코앞에서 연달아 터지는 최루탄 소리가 고막을 찢고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화학 가스 내음이 온 살 구멍을 파고들었다. 눈도 뜰 수 없고 숨도 쉴 수 없는 그곳은 말로만 듣던 생지옥이었다. 코에서 흐르는 뜨거운 액체를 느끼며 재차 기절한 나를 흔들어 깨운 건 시위 현장을 돌며 부상자를 수습하던 구조 봉사대원들이었다.

내 몸을 타고 흐르던 뜨듯하고 끈끈한 액체가 최루가스에 터진 코피와 전경의 방패에 찢긴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라는 것을 알고 나니 공포와 눈물이 왈칵 치고 올랐다. 봉사대는 응급하게 지혈을 하고 근처 민가에 나를 숨긴 뒤 부모님께 연락을 취하고는 급히 떠나갔다. 사색이 되어 달려온 엄마와 오빠의 눈물과 원성의 폭격을 다시금 받으며 대학병원에서 뇌 촬영을 하는 내내 나는 J를 생각했다.

쇠파이프를 들고 복면을 썼던 녹두대 행동대장 수배자 J. 걱정 말라 지켜주겠노라 했지만, 절체절명의 그 순간 자신의 몸을 숨기며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 새 비는 그치고 여우볕에 밀려난 구름은 해실바실 꽁무니를 뺀다. 연잎이 떠 있는 물, 물방개가 휘젓고 간 그 위를 소금쟁이가 따르며 파문을 거둔다.

‘J,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원망한 적이 없다. 지키지 못한 그 약속을 맷돌처럼 가슴에 얹고 살지는 말아라.’

하늘을 담은 연못엔 정처 없는 그리움이 무연하다.


<약력> 2016년 대한문학 등단, 광주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들지 마라 피어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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