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9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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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소리
주홍
샌드애니메이션 아티스트
치유예술가

  • 입력날짜 : 2019. 11.07. 18:11
얼마 전 ‘치유의 소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서로 모르는 아홉 명의 여성이 만났다. 나를 포함해서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 그 도시를 여행했다. 그곳은 남원이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탄생한 만복사지 터가 있었고, 동학, 빨치산까지 역사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지리산이 있었다. 그리고 동편제와 춘향의 고장이기도 했다. 남원은 작은 도시지만 한반도 전체의 서정과 자연을 무의식으로 담고 있는 도시였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남원 재래시장이었다.

시장통에 들어서자 나이든 어머니들이 판소리를 하듯이 자판을 열어놓고 말을 걸어왔다. “5천원에 한 장, 냉장고 몸빼가 5천원에 한 장이여라!” 나는 딱 걸렸다. “이리와 봐, 얼마나 시원하고 이쁜가~ 여름에는 몸빼 두 장이믄 되여라!” 나를 잡고 놔주질 않는다. “진짜 이쁘네요. 꽃무늬와 민무늬 하나씩 주세요.” 자두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놓고 싸게 주겠다고 붙잡는 목소리, 수박이 오 천원, 생선들에 물을 뿌리며 싱싱하다고 외치는 소리들에 섞여서 서로 싸우는 소리까지, 삶의 소리 한 복판에 한참 서 있었다. 멈춤이 일어났다. 시장에서는 다양한 인간의 소리가 자연의 소리가 되었다. 소리치며 살아가는 나이든 어머니들의 삶이 그 목소리에 담겨 내용은 사라지고 그 소리만이 남아 내게 ‘웅웅’하고 남았다. 마치 티벳 승려들의 만트라처럼.

나는 시장 통을 나오며, 이렇게 생의 한복판에서 자식을 낳고 키운 엄마들과 함께 치유의 소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여자가 자식을 낳아 키운다는 것은 시장에서 소리치며 장사하는 치열한 생존,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일 같은 것이다. 그렇게 모인 남원엄마들과의 첫 만남의 자리였다. 인사를 나누고 임신과 출산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나부터 시작했다. “저는 서른다섯 늦은 나이에 대책 없이 사랑에 빠졌고 임신이 된 거에요. 애가 생겨서 결혼을 했어요”하고 말을 텄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바로 아이를 갖게 된 이야기, 낳을 때의 죽을 뻔한 이야기, 아이를 잃었던 아픈 이야기, 남자를 만난 은밀한 이야기까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책으로 열권도 더 쓸 만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아직도 몸과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여자들의 수다가 시작되고 우리들은 ‘엄마’라는 교집합 속으로 모두 들어가 있었다.

빙 둘러앉아 가운데 초 한 자루 밝혀두고 엄마들의 허밍을 시작했다. 자궁 깊숙한 곳까지 숨이 들어가도록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엄~”하고 소리를 내고 또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마~”하고 길게 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내면의 소리를 내는 호흡명상이었다. 십 분쯤 반복하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엄마라는 기능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의 소리를 만나고 있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자기 자신을 만나고 그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치유의 소리는 가능하다. 기능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자신과 만나게 될 때, 그 한 인간은 곧 우주적 존재가 되고 한 명이자 전체가 된다. 여자이면서 남자고 엄마이면서 딸이고 ‘너이면서 나’인 것이다.

“날마다 잠도 못자고 일만 했어. 그렇게 고생해서 아들들을 키워놨는데, 다 큰 자식들은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질 않아. 또 그 소리 시작한다하면서 그만 좀 하라고 하고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하고 원망하는 말문이 터져서 남편과 자식들에게 서운한 마음으로 가득했던 분은 눈물을 흘렸고 고요해졌다.

울음을 터뜨리며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을 향해 내는 최초의 소리는 ‘엄~마!’다. 그 소리는 자신이 스스로 세상에 존재를 알리는 소리다. 그 소리로 호흡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일단 내면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야 치유는 가능한 것이다.

‘치료’가 주사나, 약, 수술 등으로 밖에서 도와주는 것이라면 ‘치유’는 잃어버린 힘을 스스로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의 목소리는 호흡으로 나온다. 호흡이 이완되고 편안한 상태에서 내는 소리는 그냥 ‘모음’과 같은 만트라다. 의미를 담아서 타인에게 뭔가를 요구하기 이전의 소리이고 노래가 되기 이전의 소리다. 그 소리를 찾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삶의 무게와 상처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게 하는 깊은 ‘숨’을 쉬는 것이고, 그 숨소리는 치유의 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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