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7일(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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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명품마을을 찾아서]<21>진도 연동마을
‘대몽항전’의 역사…삼별초 후예들이 사는 마을
방어 위해 해안마을에 읍성 축조 용장산성·남도진성 등 유적 남아
미륵돌과 벽파정 사당 노인신 등 다채로운 신화…이야기거리 많아

  • 입력날짜 : 2019. 11.13. 18:50
진도 연동마을 벽파정.
진도군 고군면에 자리한 연동마을. 한 주민의 이야기를 빌어 연동마을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연동마을은 바다에 의존하며 흙 속의 진주라 할 만큼 갯벌이 좋아 낙지와 조대를 잡고 김 양식으로 생활한 마을이다. 맑고 깨끗한 한 송이 연꽃이 곱게 피어난 것처럼 마을 사람들의 마음마저 곱디고운 연꽃을 닮아 순박하고 의리가 대단한 마을이라 여겨진다.

연동리는 바닷가 마을로 6·25 전쟁통에 가장 피해가 컸던 마을 중 하나인데 군사들의 훈련소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삼별초의 후예들이 정의롭게 사는 것이 눈에 거슬렸는지 동네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했던 가장 잔인한 역사를 지니고 살아가는 슬픈 마을이다.

허나 지금은 살기가 참 좋은 마을이다. 연동 앞 바닷가를 간척해 넒은 농경지가 생겨나 농어촌 마을을 겸하고 있는 부자 마을이다.

연동마을의 주 소득원은 어촌과 농촌에 있다. 바다에서는 전복양식, 다시마양식, 해태양식을 하며 논에서는 쌀을 생산하고 밭에서는 보리, 대파, 배추 농사를 짓는다.

순박한 마음으로 살아온 주민들은 그 화합된 마음을 인정받아 올해 전남도 마을활동공동체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연동마을의 전설을 아시나요

옛날 벽파진 나룻배 사공이 승객 10여명을 태우고 벽파항을 출발해 감부선 부근까지 노를 저어 가는데, 느닷없이 백발노인이 부두에 나타나 “여보시오! 나 지금 갈 길이 급하니 함께 갑시다” 하면서 간절하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삼별초 항몽순의제.목섬 탐방길 안내. 하늘에서 바라본 진도 연동마을 전경.

이 말을 들은 뱃사공은 지금처럼 기계선이 아닌 범선인지라 다시 되돌아가 싣고 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으니, 그 노인 너무 급하게 굴어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마음씨 착한 뱃사공은 결국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뱃머리를 돌려 벽파항을 향해 막 노를 젓고 있노라니 방금 뱃머리를 돌렸던 그 자리에서 무서운 회오리바람과 함께 바닷물이 하늘로 치솟고 큰 풍파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나룻배는 이미 그 곳을 벗어났기에 힘을 내어 벽파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렇게도 애걸복걸하던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려졌다.

이 같은 일은 마음씨 고운 사공과 선량한 승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벽파정당 노인신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공과 승객들은 이 고마움에 감사 보은하기 위해 벽파정 사당을 모시고, 노인신을 당신이라 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연동마을엔 수호신이 있다

진도 연동마을 길 양쪽엔 입석(立石·선돌) 2기가 있다. 정확한 위치는 마을에서 해변으로 가는 다리 입구 양 옆에 위치해 있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한때 농로를 내면서 한쪽으로 치워뒀다가 마을에 액운이 들까 두려워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마을을 지켜주는 연동 입석이다. 수호신인 셈이다.

주민들은 ‘미륵돌’ 또는 ‘동자바우(동자바위)’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 입석 앞을 지날 때에는 머리를 숙이고 다녔고,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에는 입석에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두르고 상을 차려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미륵돌은 모두 자연석에 사각석주(四角石柱) 형태로 특별한 조각은 없다. 1기는 높이 142㎝, 폭 27㎝, 두께 24㎝ 이며, 다른 1기는 높이 162㎝, 폭 25㎝, 두께 24㎝이다.

◇삼별초의 저항과 시련의 역사

진도에는 삼별초의 유적이 곳곳에 있다. 몽골군에 항복한 고려정부군에 반기를 든 삼별초는 강화에서 1천여척의 배를 이끌고 이곳 진도로 내려와 진도에 성을 쌓고 자주와 평등세상을 기치로 내걸며 또 하나의 고려정부를 선언했다.

하지만 삼별초는 진도로 내려온 지 아홉 달 만에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됐다.

진도에는 삼별초의 대몽항전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과 삼별초군이 끝까지 항전했던 남도진성, 삼별초를 이끌다 진도에서 최후를 맞은 배중손 장군을 기리는 사당 등의 유적이 있다.

진도 사람들에게는 삼별초의 진도패전이 그 뒤 오랜 세월에 걸친 유랑과 고통의 시작점이 됐다. 삼별초군이 패한 뒤 몽골군은 진도민들을 삼별초 부역자로 몰아 포로와 노예로 잡아 갔다. 그 뒤 고려 조정의 노력으로 일부사람들이 돌아오기는 했으나 몽골의 말이나 키우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1350년 몽골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고려 조정 또한 군사력이 없어 왜구가 번성하게 되자 진도사람들은 정부의 공도정책(空島政策)에 따라 섬을 비우고 영암지역으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1409년 영암으로 피난 간 뒤에는 59년 만에 해남으로 옮겼고 다시 28년 뒤 1437년에야 진도사람들은 87년의 기나긴 유랑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들은 3세대가 넘는 오랜 방랑생활 속에서도 집단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리고 오랜 이주의 역사 속에서 경험한 그들만의 고유한 정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진도’만의 독특한 문화적 정서, 문화의 보고를 만들어 냈다.

◇오래된 성터가 말해주는 역사

1964년, 사적 제126호로 지정된 용장산성은 고려시대 몽고 침입 시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성을 축조한 년대도 삼별초가 진도에 입거한 고려 원종 11년(1270) 8월 이후일 것으로 추정돼 왔다.

용장산성은 북벽구간에 해당하는 진도군 연동마을 뒤편과 벽파리 및 서벽에 해당하는 둔전저수지 북쪽구간에서 유교리와 오류리를 거쳐 북쪽 해안까지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다. 둔전저수지 남쪽에서 용장리 서쪽까지의 서벽과 용장리와 고군면의 도평리 및 오산리를 경계로 하는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남벽 및 그리고 연동마을 쪽을 향해 뻗어 있는 동벽은 석성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일부 지역에서는 성벽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상태인데, 특히 벽파리를 중심으로 한 연동마을, 둔전저수지가 들어서 있는 지역은 과거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918년 발간된 일제강점기 지도에는 벽파진 좌·우측 부분은 제방이 쌓아져 있고, 둔내저수지의 경우는 제방이 축조되지 않은 상태로 표시돼 있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퇴락하고 허물어져 군데군데 성터가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 정신은 여전하다. /최지영 자유기고가·진도=박세권 기자

/사진=김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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