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7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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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 바람꽃 억새의 노래 수필 임인택

  • 입력날짜 : 2019. 11.18. 18:54
햇볕 좋은 날이다. 곱게 익은 햇살은 냇가의 돌자갈들을 적시는 보드라운 물거품처럼 적요하고, 목덜미를 간질이는 따뜻한 햇볕은 기분 좋게 살갗에 어룽지며 떨어진다. 이제 입동도 지났으니 가을도 끝물이다. 가을은 너무 늦게 오고 너무 빨리 떠난다. 이 가을의 따뜻한 햇볕과 느긋함을 좀 더 누리고 싶지만, 잿빛 겨울이 점령군처럼 찬바람을 앞세우고 들이닥치리라 생각하면 마음이 바빠진다.

오랜만에 가까운 산행에 나선다. 산천 어디든 곱지 않은 곳이 없다. 정성을 다해 화장을 마친 성장(盛裝)한 여인의 모습처럼 경견하기까지 한다. 푸른 숲은 본연의 제 색을 발현하듯 울긋불긋 물들어 계절을 더욱 풍성하게 꾸민다. 조붓한 오솔길에 발길을 들였다. 잎사귀가 커피색으로 물든 떡갈나무의 바닥에 깔린 낙엽들이 발길에 사각사각 바스러지는 소리가 너무 좋아 자꾸 발걸음이 더뎌진다.

산과 계곡을 물들이는 단풍의 곱고 화려한 빛깔과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의 단정한 은회색, 가을은 두 가짓빛으로 깊어가고 있다. 언덕에 오르자 온통 억새꽃 천지다.

가을날 억새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아침 햇빛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를 은 억새라 하고, 해 질 무렵 노을이 억새밭에 걸리면 억새는 금빛으로 빛나 이때의 억새를 금 억새라고 부른다 했다. 아침이거나 한낮이거나 저녁나절이거나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억새는 분명 11월의 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뒤척이며 빛깔을 바꾸는 아름다운 모습의 억새 물결은 파란 하늘과 붉은 단풍에 반사되어 눈이 시려 차마 바로 보지 못할 정도이다. 바람이 한바탕 억새밭을 스치고 지나면 이 드넓은 고원에 하얀 파도가 일렁인다.

“억새는 바람의 풀이다. 억새가 가진 것은 저 자신 하나와 바람뿐이다. 그래서 억새꽃은 꽃이 아니라 꽃의 혼백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이 혼백 안에 가을빛이 모여서 반짝거린다. 작은 꽃씨 하나하나가 가을빛을 품고 있다”고 소설가 김훈은 ‘연필로 쓰기’에서 말한다. 억새들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보면 실로 처연하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며 차마 울 수가 없어 희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 같기도 하다. 억새들이 서로 몸을 비빌 때마다 솨아아 쏴아아 해조음이 들리는 듯하다. 마치 억새들이, 아니 이 커다란 산이 낮게 낮게 소리 죽여 우는 소리도 같다.

볕바른 작은 바위 위에 앉아 싸 온 김밥을 먹는다. 옛 어른들이 하던 대로 한 덩이 공중으로 던지며 고수레, 괜히 그러고 싶어진다. 가까이에 낮은 무덤이 보인다. 먼 이곳까지, 그러고 보니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곳이 아닌가 보다. 죽은 자와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산자가 만들어 놓은 기억의 집일뿐. 저만큼 늙기까지는 얼마만 한 세월이 흘렀을까? 풍경 속에 묻혀있는 무덤, 혹은 무덤가의 풍경은 결국에는 자그마한 터 하나로 이야기를 전하다가 언젠가는 그 터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기억이 망각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오래된 무덤 앞에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혼이라도 심심치 말라고 억새가 춤을 추는 걸까? 무덤가에 서서 억새의 춤을 본다. 이곳에 무덤을 이고 누운 사람도 이 산 어디쯤에서 나처럼 억새의 춤을 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가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을 것이다. 그날의 눈빛과 아름다운 노래가 억새의 춤으로 남아 다시 내게 다가오는 것만 같다.

가을 억새밭에 서본 사람은 안다. 아름다운 사랑도 때가 되면 저문다는 것을. 지금 아름다운 것들도 언젠가는 푸석푸석한 잡초가 된다는 것을. 우리들의 느낌 그리고 말과 행동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다. 오늘 내가 억새를 보며 느낀 감동과 그리움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다.

가을 억새는 날마다 조금씩 말라가면서 꽃씨를 바람에 띄워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억새는 새움이 돋아나고 피어나는 순간도 아름답지만, 그 절정은 바로 겨울바람이 불어오기 전, 여행을 앞둔 순례자의 부푼 꿈을 안고 하늘을 향해 손짓하고 있는 지금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꽃씨들을 모두 날려 보내고 나면 억새는 땅에 쓰러지고, 그러면 가을도 다 갈 것이다.

젊은 날 보낼 수 없어서 어디엔가 넣어둔 엽서 한 장, 세월을 건너온 엽서처럼 느껴지는 문득 떠오르는 억새꽃 하얀 얘기들, 점점 멀어지기 전에 가을바람에 띄워 보낸다. 혹 억새 씨앗과 함께 어디선가 다시 무더기로 피어나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임인택 프로필

▶‘문학21, 문학춘추’ 수필 등단(2002년)
▶한국문인협회, 광주, 전남 문인협회, 회원
▶광주문학상, 보성문학상, 경북일보 문학대전, 대구일보 수필대전 등 수상
▶현/ 문학춘추작가회장, 광주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장, 전남문인협회 이사
▶수필집 삶의 여백’, ‘마음에 꽃등 하나 달고’, ‘때론 바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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