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8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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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전부였던 그림으로 운명 극복한 ‘몽마르트르의 화가’
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

  • 입력날짜 : 2020. 01.08. 18:20
모리스 위트릴로 作 ‘코르시카의 풍경’ /Google 이미지 검색
1913년, 그림을 시작한 지 12년이 되었다. 어느덧 그림은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가 돼갔다. 알콜에 의존하는 순간은 자주 엄습하지만, 그림은 자책과 회한의 시간으로부터 서서히 탈출을 이끌었다.

수잔 발라동 作 ‘나의 아들 위트릴로’
파리의 프로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 전시장 안을 꽉 채운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몽마르트르를 사랑하고,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하나하나 그려갈수록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다른 화가들은 어떻게 볼지, 화단의 평가는 어떠할지, 두근대기도 두렵기도 한 전시가 시작됐다. 파리의 뒷골목, 밤이 되면 쾌락과 환락의 거리였고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길들이다. 그 곳을 꽉 채운 사람들의 흔적은 백색의 화면 뒤로 자취를 감췄다. 스스로도 수없이 거닐던 거리였고, 술에 취해 비틀대며 정신을 놓아버리기도 했던 장소들이다. 소용돌이치던 시간들마저도 하얀색은 모두 삼켜버렸다. 고요하고도 정적이 감도는 그림들 위로 내려앉은 흰색들, 시간의 흔적도 공간의 흔적도 사라진 말없는 길은 평온한 정적만을 남겼다. 방랑과 고독 속 위태로웠던 시간도 삼켜버린 하얀 파리의 뒷골목 풍경들은 뭔지 모를 씁쓸함이 배인 다른 풍경이 됐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생경한 풍경들, 마음의 평화를 바랐던 화가의 간절함은 파리 미술계에 새로운 파장을 일으켰다.

베르넴 화랑에서 작품을 수점 매입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비평가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었지만, 전시장에 걸린 그림들이 이 모든 꿈같은 사실을 증명했다. 처음으로 앙데팡당전에도 작품을 출품했고, 개인전의 성공도 거둔 서른 살, 진정 화가로서의 삶이 시작된 나이였다.

12년 전, 위트릴로가 열여덟 살이던 때 처음으로 붓을 손에 쥐었다. 어쩌면 그림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화가가 된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들, 엄마는 위트릴로와 똑같은 나이 열여덟 살에 화가의 길을 선택했던 수잔 발라동이다. 엄마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까지 아들에게 물려진 것일까. 위트릴로의 삶도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열여덟 살, 몽마르트르의 많은 화가들의 모델이었던 그녀가 스스로 화가가 되고자 했고, 사생아였던 여인은 다시 사생아인 아들을 낳았다.

모리스 위트릴로 作 ‘코탱의 골목’ /Google 이미지 검색
엄마보다는 화가의 길을 갔던 덕분에 아들은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야했다. 열 살이 되던 해 학교를 오가던 길에 만난 친구들은 어린 나이에 가지 않아야 할 길을 걷게 했다. 열 살부터 마시게 된 술은 열여덟 살 ‘알콜중독’이란 진단을 받게 했다. 은행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술 때문에 지속할 수 없었다. 엄마보다는 화가의 길에 몰두했던 엄마였기에 아들을 향한 사랑은 한없이 부족했고, 사생아라는 현실은 사회 안에서 늘 위태롭게 주위를 맴도는 꼬리표였다. 턱없이 부족했던 사랑은 자꾸만 사회의 뒷길로 비껴가게 했다. 인내심도 진중함도 없었고, 예민한 성격과 억제된 현실은 자꾸만 술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술에 의지하는 순간 현실을 벗어나게 되는 착각은 결국 그의 삶을 끝없이 밑바닥으로 내몰았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질 때 위트릴로를 끌어안은 것은 엄마였다. 아들의 알콜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그녀는 그림 그리기를 권유했고, 처음으로 아들과 마주앉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독과 방랑의 시간을 보낸 위트릴로에게 그림은 새로운 생의 시간을 선사했다. 늘 곁에 있지 않았던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 덕분인지 예술의 세계로 들어가는 몰입의 시간 덕분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는 것이었다. 스무살이 되고 본격적으로 그림에 집중했다. 허나 부유한 집안도 아니었고, 정규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기에 그림의 소재도 방식도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길이었다. 가장 익숙했던 풍경인 파리의 거리들, 수없이 오가던 길의 체취들을 그림으로 옮겼다. 파리의 모습을 담은 수많은 엽서들을 모아 그 익숙한 풍경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 시간과 공간의 흔적을 묵혀낸 흰색들, 그 흰색의 익숙한 체취를 위해 팔레트 위 물감에 석회나 모래를 섞었다. 두툼해지고 거친 물감은 손때 묻고 바래진, 비바람과 숨결을 삭혀낸 두툼한 흰색이 됐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현실의 때를 벗은 또 다른 적막과 고요가 감도는 파리 시가지는 묘한 매력을 뿜어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생의 출발에서부터 삐긋거리던 시간, 주류 사회에 편입될 수 없었던 소외된 시간들, 스스로를 더욱 벼랑으로 내몰며 휘청거리고 떠돌던 거리였지만, 마음 한 구석 늘 갈망했던 평화와 안정은 그림 속 또다른 세상을 창조해 나갈 수 있게 했다. 모든 것을 정화시켜줄 것만 같았기에 흰색을 선택했을는지도 모른다. 속죄의 마음으로 그려간 교회의 모습,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첨탑의 하얀 십자가, 사람들의 모습마저 삼킨 백색 풍경들엔 모리스 위트릴로 스스로 정화와 구원의 삶을 갈망했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됐다.

“상류의 주택가보다도 서민가 쪽이 호사한 색조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사인(死人·알콜중독으로 인한 별명)이 되면서부터 그림의 비결을 깨우쳤다. 즉 백으로 칠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교회당에 있는 침묵의 색, 백으로 칠해야 된다. 병원, 형무소의 색, 백으로 칠해야 한다. 나의 일생은 이러한 사람들의 눈 밖에 난 집들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는 백의 한가운데서….”

하얀 풍경들은 그의 삶을 보듬었고, 드디어 한 인간으로 세상과 타협해 갈 힘을 가질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열두 해를 화실과 정신병원을 오가며 스스로를 붙들었던 시간은 전시의 성공을 가져왔고 지난 시간을 충분히 보상했다. 36세 때 르프트르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화단의 기린아가 돼 전람회, 경매 등이 빈번해졌다. 당연히 평단의 호평도 쇄도했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그려진 백색 그림들은 향후 위트릴로의 ‘백색시대’로 그를 대표하는 그림들이 쏟아진 시기였다. 하지만 화가로 굳힌 입지에도 불구하고 태어날 때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우울은 술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진 않았다. 형무소도 정신병원도 오가며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롤러코스터같은 시간은 빈번했지만, 한 인간으로서 극복하기 힘들었던 암울하고 비참했던 현실은 더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가는 길로 이끌었다. 치열했던 시간은 백색그림이라는 당시 주류미술에 편승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선택하게 했고, 성공을 움켜쥐게 했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45세가 되던 해, 엄마인 수잔 발라동과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늦은 나이인 52세가 돼 자신의 작품 애호가이자 부유한 미망인이었던 뤼시 포웰과 결혼으로 삶은 조금 더 안정을 찾아갔다. 1950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앙리 마티스, 피에르 보나르, 자크 비용과 함께 프랑스관 작가로 선정되며 살아 생전 더할나위 없는 영광까지도 맛보게 됐다.

1955년 일흔 두 살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하고 몽마르트르에 묻히며 영원히 몽마르트의 화가가 된 위트릴로. 그의 그림은 그의 삶을 끝없이 반증했다. 위태롭고 암울한 삶이었지만, 화폭에 담은 것은 그의 이상이 아니었을까. 외롭고 고독한 날들을 위로하려 시작한 그림이었기에 그의 간절한 마음은 순백의 그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또 보잘 것도 가진 것도 없었기에 더 순수의 마음으로 다가간 예술은 기존 화풍을 따라가기 보다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했다. 벼랑 끝 삶의 작은 실마리를 붙들게 해준 그림에 담긴 간절함은 지금까지도 몽마르트르의 신화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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