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9일(목요일)
홈 >> 오피니언 > 시론

표 한 장의 넋두리
강용
학사농장 대표

  • 입력날짜 : 2020. 03.24. 19:29
농촌에서 태어나 줄곧 농업에 몸 담고 있는 한 지인이 있었다. 농업과 농촌의 현실은 늘 부딪치는 생활 인지라 생활 속에서 느낀 문제점과 나름의 해결 방안을 정리해서 지속적으로 정부에 제안하고 건의하는 열정의 소유자였고, 실제 그의 제안을 통해 제도와 정책이 바뀌거나 생겨나기도 했다. 어느 날 그 지인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모 정당의 인재영입위원회라며 국회의원 비례대표의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던 터라 혹시 사기꾼이 아닐까 실없이 웃어넘겼는데 며칠 뒤 그 정당의 인재영입위원장이 직접 찾아왔다고 했다.

정치는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농업밖에 모르는 자신에게 왜 이런 기회가 오는지, 과연 자신 같은 평범한 농민이 정치라는 거대한 세상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얼떨떨하면서도 혼란스러워했다. 꽤 긴 시간 깊은 고민을 하다가 당선 우선순위 등 영입의 조건을 마다하고, 정치를 하게 된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결국 그 제안을 거절했다.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조언했지만, 완전한 경제적 자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정치인에게 숱하게 다가올 유혹들과 그 과정속에서 일어날 갈등, 그리고 원래 가진 농업의 꿈을 위해 거절하겠다는 그를 설득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몇 차례 거절에도 간곡히 부탁하는 인재영입과 공천심사위원에게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왜?’라는 질문에 ‘삶의 현장에서 몸소 경험하고 느낀 평범한 사람들이 의정활동을 통해 세상을 바꿔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바로 비례대표다’라고 말했다고 들었다. 그 정의가 맞는지는 내가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몇 년 뒤 그 지인은 비슷한 제안을 다른 정당에서도 받았지만 역시 정중히 거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과정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나는 그동안 쌓여 있었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비례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줄을 잘 서야하고, 뭔가 매우 특별해야 하고, 계파정치의 도구라거나, 심지어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돈이 많아야 한다는 등의 편견도 깨졌다. 내가 본 ‘그’와 그들이 본 ‘그’의 모습이 다를 수는 있지만, 처세에 썩 능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일상 속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노력만으로 나이, 학력, 빈부에 상관없이 정치(정책) 입문의 기회가 올 수도 있는 만큼 우리도 선진화가 되었다고 적잖은 감동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작은 씨앗도 땅에 떨어지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고 열매도 맺는데, 요즘의 우리 정치는 열매는 커녕 뿌리 한두개라도 민주주의에 박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입은 ‘국민’을 말하면서 계파의 이익에만 혈안이 돼 원칙과 기준을 편리한 대로 바꾸고, 비례대표에도 정책보다 정치만 우선되고, 각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들에 절망감마저 든다. 광우병, 메르스에 이어 코로나19 역시 각자의 진영 논리에 따라 사실까지 왜곡해 국민을 선동하는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더 퇴보한 모습이다.

과거 임진왜란 직전, 선조의 명으로 일본의 동향을 살피러 갔던 계파가 다른 두 사절단이 돌아와서, ‘서인’ 출신 황윤길이 선조에게 ‘일본의 침략’을 예고하는 의견을 말하자 ‘동인’ 출신 김성일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궁궐을 나오면서 김성일은 같은 당파인 류성룡에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못한다. 단지 황윤길이 너무 강하게 말해서 그랬다’ 고 털어놨다. 무능한 지도자는 당시 실세였던 동인의 김성일 주장에 따랐고 결국 그 대가는 백성들의 목숨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 없지만, 만약 김성일이 먼저 보고를 했어도 일본의 침략은 없다고 했을지, 단지 상대 계파가 찬성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은 아닌지 참 궁금하다.

도대체 우리 정치의 ‘씨앗’은 무엇이었길래 이런 ‘열매’만을 맺는 것인지,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분노하며 들었던 비겁과 탐욕의 정치를 지금도 볼 수 있다는 것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 참 부끄럽다. 이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지 많이 고민도 해 봤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런 지혜까지는 부족하다. 그저 내 ‘표 한 장’ 투표나 제대로 하는 수밖에….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많이본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