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4일(목요일)
홈 >> 기획 > 기획일반

[산책하는 소설가의 세상읽기]함께 보고, 듣고, 당당히 나설 때, ‘가해자 중심’ 편견은 무너진다
우리의 귀는 열려있습니까?

  • 입력날짜 : 2020. 05.14. 19:02
‘제임스가 죽었대’라는 독특한 제목의 애니메이션은 이렇게 시작한다.

A가 B에게 “파티에서 누가 제임스를 죽였대”라고 전한다. 그러자 B가 묻는다. 파티에 혼자갔대? 술 마셨대? 뭐 입고 있었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A의 말에 B가 말한다. 취해 있었다면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아도 저항하기 어려웠겠지, 목에 칼 맞기 싫으면 V넥 티셔츠가 아니라 터틀넥을 입었어야지,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이 파티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과 말을 걸면 안 되지, 대학생 다섯 명 중 한 명이 살해당하는 현실인데 더 조심했어야지….


어이없어 하면서도 단호하게 반박하지 못하는 A에게 B가 다시 말한다. 제임스가 원래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친절한 사람이었으니 결국 살인자를 만나는 건 당연해, 게다가 제임스는 누가 봐도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을 하고 싶게끔 만드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제임스를 죽였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냐. 당황하면서 어버버하는 A에게 B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제임스가 죽길 원했던 거지, 그 순간 생을 끝내고 싶었다고, 그렇다면 ‘멋진’ 로버트는 ‘진짜’ 살인자가 아냐. 불쌍한 로버트, 사람 죽였다고 이렇게 유망한 청년의 인생 종치는 거 보면 안타까워….

B의 주장에 따르면, 살해당한 제임스는 평소의 옷차림과 성격, 표정 때문에 ‘살해당할’ 만한 사람이고 살해당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피해자가 아니며, 평소 평판이 좋은 로버트는 제임스 같은 사람과 연루돼 유망한 미래가 구겨져버린 재수 없는 사람이다.

어떤가. 상식적인가. ‘살인을 당할 만해서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의는커녕, 그 사람의 판단능력과 인성까지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살인을 하고 싶게끔 만드는 표정’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다른 범죄에 대해서는 어떨까?

‘제임스가 죽었대’가 아니라 ‘제임스가 성추행 당했대’라는 제목이면 어땠을까? 술에 취해 있었으니 자기 몸을 보호하지 못했던 거지, 목선이 드러나는 옷을 입었으니 당하는 거지, 생판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게 잘못이지, 흉악범들이 날뛰는 세상인데 더 조심했어야지…. 이런 대사를 내뱉는 사람의 판단능력을 의심하게 될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될까. 결국 제임스가 성적 접촉을 원했고 그러니 제임스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비상식적으로 느낄 수 있을까?

‘제임스는 죽었대’(Blue Seat Studio, 2016) 화면 캡처. <한국양성평등교욱진흥원 성평등교육플랫폼 젠더온 제공>

이 애니메이션을 언급한 이유는, 최근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오래 전 사건이 이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 일’은 정확히 56년 전에 일어났다.

강산이 대여섯 번 바뀔 정도의 세월이 흘렀지만 최말자씨는 그날 저녁의 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1964년 5월 6일 오후 6시, 낯선 남자가 자신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다시 일어서려는 몸짓을 짓밟고 강제로 입맞춤을 시도했다. 그녀는 저항했고 자신의 혀를 탐하는 낯선 혀를 깨물었다.

법원의 결론은 이랬다. 강간미수로 볼 수 없으니 정당방위로 인정할 수 없다. 고로 남성의 혀를 깨문 여성을 상해죄로 처벌한다.

정당방위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그녀가 자기 발로 범행 장소까지 걸어갔고 이성에 대한 호기심의 소치라 할 수 있으며, 키스하려는 충동을 일으키는데 일조했고 강제 키스만 했을 뿐 반항하지 못할 정도로 꼼짝 못하게 한 것은 아니다.

어떤가. 제임스가 술을 마시고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고 죽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어 살인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했다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판결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56년 전의 판결이니 지금보다 뒤쳐졌고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건의 당사자인 최말자씨는 재심을 청구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로, “사회현실을 접하다보니 56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정당하게 분노하듯,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돼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우리는 여전히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최말자씨의 행동을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타인의 신체에 대한 침범이 없었다고 판단한 것과 같다. 이는 ‘그 저녁의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법원과 사회는 그녀의 목소리를 부정했고 갑작스러운 침범으로 공포에 떨었을 몸의 경험을 무시했으며 내면에 각인된 상처를 보지 않은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최말자씨가 다시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을 묻는 것은, 그 일은 명백히 일어난 일이었고 자신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를 당했음을 인정받기 위한 것이며, 그 일로 인해 부정당한 경험을 되찾아오기 위한 노력이다. 피해와 상처가 있었음을 인정받는 것은 한 인간이 그 피해와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시작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치부해버리는 것에 저항하는 그녀는 지금, 그 한 순간의 의미를 위해 온 삶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전사가 돼 간다.


그 노력이 왜 이제야 이뤄지는가?

최말자씨가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시선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끼면서도 용기를 낸 것은, 서지현 검사와 김지은씨의 미투 운동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여전히 피해자가 비난받는 사회 분위기지만, 달라진 것도 분명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낸 사람들이 있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다.


들을 귀가 있을 때 목소리는 들린다. 들을 준비가 된 귀가 있을 때, 입은 트인다. 귀가 입이 되고 다시 입이 귀를 뚫는다. 나는 무섭고 두려웠다. 라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된 귀들이,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목소리들이 된다.

1분1초의 짧은 경험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스스로 해석할 권리와 온전한 존재로 존중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는 외침이 된다.


정미경
광주여성가족재단 근무·소라넷 다큐소설 ‘하용가’ 저자
작은 목소리도 놓치지 않는 귀, 그들은 ‘제임스가 죽었대’의 A와 다르다.

어느 시대나 B처럼 말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마음대로 지껄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A, 당할 만해서 당하는 게 아니라고 외치는 A, 그 익명의 무수한 A가 아직 머뭇거리는 또 다른 최말자씨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더 많은 목소리들이 들리도록 할 것이며, 움츠린 등을 펴고 세상을 향해 말하기 시작하는 스스로에 대한 존엄과 해방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최말자씨는 다시 일어설 것이고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거듭날 것이다.

그 변화야말로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지 않을까. 그렇기에 오늘 나는 내게 또 다시 묻는다. 나의 귀는 지금 들을 준비가 돼 있는가? 우리의 귀는 열려있습니까?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많이본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