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5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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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교수의 일본 작가 비평](17)한국에서 바라본 마쓰다 도키코
‘1933년의 봄’ 일본 권력과 친일파 원흉에 희생된 조선인들

  • 입력날짜 : 2020. 09.23. 18:31
사건 취재할 때의 마쓰다 도키코(마쓰카와 사건 취재 당시),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 취재-
지난 회에서 마쓰다 도키코가 벗과 우정을 나누며 첫 시집 ‘참을성 강한 자에게’를 집필하는 과정까지 살펴봤다. ‘참을성 강한 자에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할 기회가 있을 터이니 미루고 당시 마쓰다의 활동에 눈에 띄는 점이 있어서 들춘다.

마쓰다는 33년 초 화재사건을 취재한 것으로 밝혀졌다. 필자는 최근 작가와 조선의 접점 모색을 위해 1930년 중반의 작가 행적을 추적하다가 마쓰다가 사건현장을 방문한 뒤 집필한 르포가 있음을 확인했다. 짧은 분량의 르포로, 제목은 ‘1933년의 봄’. 말미에 1933년 1월이라고 새겨져 있으니 이는 집필 시기에 다름 아니다.

‘1933년의 봄’은 ‘문학신문’ 26호(1933년 1월15일 자)에 발표됐다. 마쓰다 도키코의 르포집 ‘되찾은 눈동자’(마쓰다 도키코 자선집 8권, 사와다출판, 2008년)에도 실려 있다. ‘1933년 봄’은 한마디로 논픽션의 본령에 충실한 보고문이다. 작가가 조선인들의 목숨을 앗은 화재 현장을 직접 방문, 취재한 내용을 독자에게 보고했다는 점에서 유의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마쓰다는 ‘1933년의 봄’의 초입에 ‘33년 원단(元旦) 도쿄, 후카가와(深川) 도미카와초(富川町)’라고 시간과 장소를 명시한다. 이 지역은 현 고토구(江東區)로 당시 마쓰다가 거주하던 곳. “세상 사람들은 ‘도미, 도미’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매우 가난한 도미카와초”라며 얼마나 궁핍한 지역인지를 밝힌다.

‘화재조사의 역사’(北後明彦·고베대학 도시안전연구센타) 등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1932년 말 도쿄에선 두 건의 큰 화재사고가 있었다. 현 니폰바시(日本橋)의 시로키야(白木屋)백화점과 마쓰다 도키코 거주지인 후카가와의 오토미(大富)시장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다. 시로키야백화점에서는 14명, 오토미시장아파트에서는 23명의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사고 지역인 후카가와(현 고토구)에 위치한 강의 야경.

마쓰다는 3층짜리 목조건물인 그 시장아파트 화재현장으로 달려갔다. “검게 그을린 기둥만이 활짝 갠 하늘 앞쪽에 널부러져” 있었다. “불에 타고 발에 밟혀 젖은 상태로 함석판에 처박힌 센베이 이부자리의 잔해”. 마쓰다는 얼마나 화재 후의 현장이 처참한지 그 광경을 생생히 전한다. 그리고 관계자에게 묻는다. “몇 명 정도가 희생됐나요?”라고.

“첫 날엔 19명이라고 하고 둘째 날엔 7명이 나왔다고 하네요. 셋째 날엔 4명인가 5명이라고…”라는 대답을 듣는다.

이 대답에서도 유추할 수 있지만 사건 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희생자 숫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뤄지지 않았다. 수습의 초동 단계였다. 관계자가 얼추 희생자 30여명으로 증언했을 법 하다(나중에 23명으로 판명되지만).

3층까지 전소돼 7일 동안 순사가 몇 명이나 지키고 있었고 외부사람은 현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관계자의 얘기도 타당하다. 화재사건이 12월23일 발생했으며, 르포 도입부의 ‘원단’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해가 바뀐 뒤 마쓰다가 현장에 달려간 셈이니 말이다.

사건의 내막을 캐묻는 마쓰다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다. 나나쓰다테 사건을 취재하며 조선인 희생자 숫자를 점검할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을 터.

노동자, 농민, 조선인, 중국인 등 약자들의 고통 현장을 찾아 발로 뛴 작가였던 만큼 그런 분위기가 생소하지는 않았으리라.

“소방서에서는 곧장 오지 않았나요?”라는 질의와 “30분이 지나서”라는 응답이 오간다. 관계자는 “층계 아래는 전부 시장이어서 채소가게도 생선가게도 튀김(덴뿌라)가게도 도리가 없었죠. 기름이 타올랐으니…. 아래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도 있었고 2층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작 구출해야 할 땐 소방서 직원이 오지 않았기에”라고 설명한다. 얼마나 초조하고 긴박한 상황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마쓰다는 “30분이나 늦게?”라고 되물으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시선을 사로잡는 대목은 이 3층 목조건물의 ‘가장 넓은 6조-4조반, 그리고 3조 크기의 방 60칸 정도가 2층에서 3층까지 이어져 있었고, 평균 5-6명 가족의 조선인들이 70%, 일본인들이 30% 세 들어’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가난한 지역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시장통의 건물이니 만큼 식민지 조선인들이 물건을 팔며 집단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 지배계급과 조선인 친일파를 고발-
건물주는 누구였을까? 마쓰다의 예리한 펜촉은 사건 배후를 찌른다. 화재사고 발생 당시 “조선인 최초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로서, 조선 노동자 농민의 배신자로서 유명한 박춘금(朴春琴)의 손에 (건물이) 넘어가 있었던” 사실이 적실히 드러난다.
중의원 당선 당시의 친일파 박춘금(1932년).

마쓰다는 출신과 지위를 초월해 여느 때나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작가다. 제국 권력에 아첨해 조선 노동자 농민의 배신자가 된 자를 용납할 리 없다. ‘배신자’라는 세 글자는 그 점을 의식한 야유와 타매의 직설적 표현임이 분명하다.

박춘금 대신 건물관리를 하는 자가 있었는데 시설에 투자하기는커녕 빚 독촉에 여념이 없었다. 건물에는 날품팔이나 실업자가 많아서 방세가 밀린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당일 버는 대로 방세를 내게 하거나 3일간 모으면 4일째에는 쥐어짜서 받았다고 하니 박춘금의 소행이 가관이다. 마쓰다가 어찌 분개하지 않고 잠자코 있겠는가. 친일파 박춘금이 권력의 탈을 쓰고 조선인 동족을 수탈하는 상황을 마쓰다는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하사금이 나올 때도 있었다는데요?”라는 마쓰다의 물음에 관계자가 “그게 어찌된 일인지…. 허드레옷을 받은 사람은 있었지만요”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장면이 조선인에 대한 처우를 추정케 한다. 이는 조선인들에게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뒷받침한다. 또한 “방화설비에는 뭔가 있었나요?”라는 의문 제기에 “부엌도 변소도 사다리단을 내려가야 했기에”라고 얼버무리는 표현으로 보아 배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주거환경이었음이 읽힌다.

1930년대의 도쿄에서 생활하던 조선인들의 동향을 분석한 ‘1930년대의 도쿄 부하(府下) 조선인 인구추이’(松本俊郞, 오카야마대학 경제학회잡지 17, 1985)등의 연구에 따르면, 30년대에 들어서 공업지대의 증가와 택지지역의 확대 현상으로 인해 매립공사나 토목공사가 20년대에 비해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따라서 도쿄내의 조선인 취업처나 취업수단이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위의 연구는 조선인들이 일정한 지역에 집단으로 생활기반을 두기 시작한 사실을 커다란 특징으로 거론한다. 또한 화재사건이 일어난 후카가와의 인구 동향을 분석해 외지인(거의 조선인)이 1920년 169명이었던데 비해 1930년에는 3천654명으로 증가한 도표도 제시한다.

후카가와 오토미시장의 그 목조건물에선 시장에서 상행위를 하던 조선인들이 각지에서 모여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으리라.

시장에서 채소나 생선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하는 조선인들이기에 한 방에 여러 명 기거하면서 날품팔이를 해 집세를 지불했을 터. 하지만 그 집세가 너무나도 부담인 상황이었다.

르포는 이 점을 적확히 꿰뚫는다. 르포의 핵심은 마쓰다가 화제의 원흉이자 조선인들의 목숨을 앗은 주체를 밝히는 부분이다. 마쓰다 도키코는 다음처럼 기록했다.


여기에서 일본인 조선인 남녀 구별 없이 30여명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 단지 ‘화재’라는 재난일까? (그건) 거짓말이다. 함석투성이의 연립주택에 비싼 집세를 매긴 박춘금을 조정한 주체인 일본 지배계급이다. 그 지배계급은 지금 만주 들판에서 총기를 발사해 몇 백 명이나 되는 노동자 농민 병사를 살해하고 있다.(‘1933년의 봄’에서)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 전남과학대 교수
이는 다수의 조선인들을 희생시킨 게 비싼 집세로 조선인을 착취한 친일파 박춘금과 그를 배후 조정한 일본 권력층임을 명확히 밝힌 언설이다. 즉 마쓰다는 일본제국주의에 빌붙어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의원에 당선돼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박춘금과 일본 지배계급을 싸잡아 화재 발생의 원흉으로 거론한 것이다. 마쓰다가 배신자로 지명해 ‘함석투성이의 연립주택에 비싼 집세를 매긴 박춘금’을 공범자로 이름을 새겨 넣은 이유도 그곳에 있다.

마쓰다가 화재현장 취재에 근거해 발표한 이 르포는 조선인들의 희생은 화재 그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설비에 투자하기보다 한통속이 된 일본 지배계급과 친일파가 조선인 상인들을 착취한 결과에 의한 것임을 세상에 고발한 기록이다. 나아가 침략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제국주의를 향한 개탄의 메시지다.

집필 시기가 일본의 대표적 혁명작가 고바야시 다키지의 학살 바로 1개월 전이다. 그야말로 특별고등경찰이 악명을 떨치는 탄압하의 시절이었다.

마쓰다 도키코는 바로 그때 일본 권력과 그들의 앞잡이가 무고한 조선인들을 억압하다가 희생시킨 사실을 1933년 첫날 기록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르포 ‘1933년의 봄’의 의의를 논할 만하다.

<김정훈·전남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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