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1일(수요일)
홈 >> 기획 > 기획일반

[키워드로 보는 명화이야기]The machine(2) 속도만 있고 방향성은 부재했던 ‘미래파’(futurism)
기계, 그리고 인간 공존시대…화두는 ‘올바른 방향성’

  • 입력날짜 : 2020. 10.15. 17:21
지아코모 발라 作 ‘발라 자동차 속도’ (왼쪽) 제비들의 비상 /위키피디아 검색
4차 산업혁명 등에 힘입어 빠르게 변화돼 가고 있는 세상 속,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기계들과 첨단기술이 가져온 속도감에 실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운 현재다. 게다가 앞서 다뤘던 인공지능 화가의 창작 작품에서도 볼 수 있었듯 기계가 인간의 삶에 미치고 있는 범위 또한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부분까지 넘나들며 광범위해진 상태다.

그러나 이 같은 빠른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속도가 향해가고 있는 목적지, 즉 방향성이라 하겠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인류가 겪어냈었던 이전의 혁명들만 천천히 훑어보더라도 선례들을 통해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것이며, 방향성을 갖지 못한 속도전의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나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늘 변화를 꿈꾸고 거듭되는 변화를 통해 발전과 성장을 이루고 있는 인류지만, 공존에 대한 고민이 없는 성장은 불행한 결말만을 가져올 뿐이다. 그렇기에 변화가 추구하는 목적성이 한쪽으로만 치우쳐 버릴 경우 그 또한 결코 올바른 방향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주체적이지 못하게 소수의 욕망만을 위해 끌려가듯 사는 삶이 과연 행복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서라도 그 방향에 대한 고민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미술 장르에서도 기계 발명이 가져온 여파는 매우 컸다. 그중 카메라의 발명이 가져온 변화는 오랜 시기 동안 미술사의 화두였던 ‘재현의 문제’ 즉 ‘사람의 손기술이 이젠 더 이상 화제가 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 하면 단연 눈으로 본 대상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내는 능력이 필수다. 그렇지만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일말의 감성적인 부분을 제외한다면, 단지 얼마나 ‘똑같이 대상을 그려낼 수 있느냐’라는 원론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찍어내는 카메라와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화가들의 손기술은 더 이상 화두가 될 수 없었고, 기존 화가들의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화가들은 사진이 하지 못하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고흐가 속한 ‘인상파’ 화가들을 보더라도 예전처럼 ‘물체가 가진 형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통해 드러나는 사물의 순간적인 아름다움 즉, 사람의 눈으로서만 관찰 가능한 아름다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는 형태나 색이라는 예술적 전통성을 ‘전부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며 ‘개념과 물질’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류들도 등장했다. 그중 의미 없이 내뱉는 아이의 의성어 ‘dada’처럼 ‘아무 의미 없음’을 그룹 이름으로 내세운 ‘다다’가 있었고, 다다이스트로는, 일상용품인 변기에 새로운 개념을 덧씌워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발표한 ‘뒤샹’을 들 수 있다. 이처럼 화가들은 카메라라는 기계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내기 위해 추상으로 혹은 개념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기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신봉하는 모습을 보인 사조도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미는 속도다.’라는 슬로건처럼 미술사 속에서 기계들에 관한 언급을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미래파’(futurism)다.

‘기계, 속도, 힘’에 관심을 가졌던 미래파는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피가로지(Le Figaro)에 1909년 2월20일자 발표한 ‘미래주의 선언문’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세계의 광휘가 새로운 아름다움 즉 속도의 아름다움으로 풍부해졌음을 선언한다. 폭발하는 듯한 숨을 몰아쉬는 뱀과도 같은 두꺼운 파이프로 뒤 트렁크가 장식된 경주용 자동차, 난사되는 기관총 위를 달리는 듯 포효하는 자동차 한 대가 승리의 여신보다 더 아름답다. … 우리는 세계의 유일한 위생대책인 전쟁과 군국주의, 애국주의, 무정부주의자들의 파괴적 몸짓, 살인하는 아름다운 이념들, 여자에 대한 무시를 찬양하고 싶다.”(선언문 중 일부 발췌)

산업혁명 직후 급진적으로 발달 돼가던 기술발전에 편승해 발전을 이뤄가고 있던 이탈리아에서,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났던 독특한 예술운동인 미래파 운동은 당시 그 나라의 시대 상황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야 겨우 통일된 민족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후진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공업화를 서둘러야 했다. 게다가 과거 자신들의 화려했던 로마제국과 르네상스의 역사를 뛰어넘어서야 한다는 부담감도 또한 컸었기에 조금은 급진적이고 센세이셔널(sensational)한 그 무엇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한마디로 급한 발전 탓에 미처 탄탄하게 가다듬어지지 못한 현재 상황들을, 전통을 거부하면서 혹은 손쉽게 다가설 수 있던 현대미술을 앞세워 문화적으로 극복해 보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오로지 비판 없는 낙관으로 전통을 거부하고 기술발전을 신봉했으며, 넘치는 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낙후돼있던 화단에 혁명적인 미래의 미학을 제시하고자 했다. 테러리스트를 방불케 하는 과격한 어조로 역사적 전통 부정하려 하려던 그들은 운동감, 속도를 작품에 표현하려고 했다. 게다가 일부 미래주의자들은 파시스트인 무솔리니 정부에 가담하기도 했었고, 그들이 신봉했던 신문물의 극단을 보여주는 제1차 세계대전에도 실제 참전했었다. 미래주의가 이후 미술사에 미친 긍정적 영향이 적지 않음에도 오랫동안 저평가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연유에서 오는 것임은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다.

초창기 촌스럽기 그지없었던 미래주의를 구해준 것은 프랑스에서 온 ‘세베르니’였고, 그가 이들에게 ‘피카소’의 분석적 입체주의를 소개하면서부터 세련돼지는 면모를 볼 수 있다. 물체를 정위치에서 바라본 모습을 똑같이 그려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 화면 속에 여러 위치에서 본 대상의 모습을 담아보고자 했던 입체파 화가로는 ‘피카소’를 들 수 있다. 그는 2차원의 평평한 화면 속에 3차원인 대상의 모습을 담아내려 노력했고, 여러 각도에서 본 대상의 이미지를 한 화면 속에 모두 그려 넣었다. 그러다 보니 형태가 깨어져 버렸고 초창기 입체파가 잃어버린 형태를 색감으로서 극복해 나가고자 분석적 입체주의로서 변화를 일궈냈다.

이런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변화시킨 미래파는 산업화가 만들어내는 ‘속도’, 즉 ‘대상의 움직임’까지도 화폭에 담고자 했다. 대상이 움직이는 여러 순간을 한 화면에 담으려 했던 것은 ‘시간과 운동의 미학’과 연관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움베르토 보치오니 作 ‘공간 속 연속되는 형태’(左)와 발라 作 ‘끈에 묶인 개의 움직임.

이 시기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으로는 보치오니의 ‘끈에 묶인 개의 움직임’ 등이 있다. 이 작품을 살펴보자면 우리 입장에서는 조금 진부해 보일 수 있지만 기존 화폭에서 볼 수 없던 것이 담겨 있다. 숙녀의 다리와 그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강아지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당황스럽다. 마치 다리가 여러 개인 것처럼 묘사된 이 작품은 사진 한 컷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움직임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미래파 선언문을 발표했던 보치오니의 브론즈 작품 ‘공간 속 연속되는 형태’에서도 이런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 조각품에서도 걷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마치 연속된 스틸컷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도 속도가 조각으로서 표현돼있는 것을 살필 수가 있다. 독자들은 어떤가? 최첨단 기계인 인공지능에 관한 논의가 한창인 시기를 살고 있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이들의 화풍이 어쩌면 조금은 뒤처져 보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탈리아에서만 일어났던 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래파가 가져왔던 것들은 센세이셔널 했고 파장 또한 대단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신봉했던 기계기술의 최첨단을 선보일 수 있었던 전쟁이 보여준 결과는 그야말로 비참했고, 직접 전쟁에 참전했던 미래파 화가들 또한 이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렇듯 당시 기계문명의 극단적 면모를 보인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래파 운동은 소멸되고 말았다.

이현남
<전남대 미술이론 박사수료>
지금 또 하나 새로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과정에 있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바로 기계에 대한 무차별적인 신봉이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왔느냐에 얽힌 것 즉, 방향성에 관한 것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이지만 선례를 바탕으로 짐작할 수는 있는 일이다.

따라서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기계로서 ‘활용도가 중심’이 돼 세상 모든 것들과 효과적인 방향으로 ‘상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또한 예술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해낼 수 있는 ‘문화적 리터러시’를 키우려는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렇듯 선례들과 올바른 방향성을 바탕삼아 포스트 코로나 시기 무서운 변화 속도를 보이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속에서도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미래가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많이본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