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3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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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창사30주년 릴레이 에세이](2)고영서 시인
“나에게 시인이란 날개를 준 신문”

  • 입력날짜 : 2021. 01.27. 19:42
바람이나 쐬겠다고 잠깐 나선 저녁/한낮을 바스락대던 나뭇잎 속에서/
쓰르라미 한 마리가 귀를 당긴다/너른 길이 끝나는 약수터를 지나/
몇 개의 무덤을 지나/구부러진 산의 내장 환히 열어 놓고/
무연한 달,/저 혼자 물이 올라 있다/휘모리로 감기는 바람 데불고/
소나무 사이로 걸어 나갈 때 그래,/저 달과 통정한들 죄 되랴 싶은 것이지/
거추장스런 외투 벗어 허리에 묶고/부드러운 능선을 타는 것이지/
나무와 나무 사이 거미줄에 엉기면서/도토리 한 알에도 미끄러지면서/
우거진 터널 헤치고 오르고 올라/꼭대기서 숨이 딱! 멎는 것이지/
혈관이 터지도록 조여드는 달의 감촉/신열을 앓듯 젖은 옷자락 끌고/
내리막길에 이르렀다/바람이나 쐬겠다고 잠깐 나선 저녁/
쓰르라미 울음소리 멎지 않던 저녁/내 무한의 발자국 소리 들으며
-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달빛 밟기’ 전문


광주매일 신춘문예로 등단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고 실감하게 된 것이 17년 전이다.

잡지에 글을 발표할 때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작가 이력이다. 내 이름 뒤에는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로 등단’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지난해에는 특히 원고청탁이 많았고, 겨울호에는 ‘창작과 비평’을 비롯한 문예지에 열여섯 편의 적지 않은 시를 발표했다. 현실은 늘 녹록지 않아서 낮에는 마감에 쫓기며 일을 하고, 집에 오면 늦은 밤이라도 컴퓨터 앞에 앉아야 했다. 한 줄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강박감, 그것이 나를 살게 하니까.

부산에서 발행하는 ‘신생’이라는 시 전문 계간지에 나의 시(특집시) 10편과 이메일 대담, 평론이 함께 실렸는데 대담 중에 시의 소재는 어디서 얻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단연코 “신문!”이라고 대답했다. 신춘문예가 인연이 되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구독 중인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미기(美妓) ‘어란’의 이야기나 광주항쟁과 관련한 여러 편의 시들은 실제로 신문을 보고 쓴 것들이다. 종이에 찍힌 활자는 눈으로 보고 뇌리에 남는다. 전자책과 함께 인터넷 시대에 종이가 사라질 거라는 우려에도 책과 종이신문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연예인이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연기자가 나이가 드니 눈이 피곤해서 종이신문을 구독하게 됐다고 하자 그것을 TV로 본 한 일간지 기자가 찾아가 밥이라도 사드리고 싶었다는 웃픈 사연을 읽은 적이 있다. 내게도 신문에 얽힌 미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설하고,

광주매일신문 창사30주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빛이 한가운데 떠 있을 때 그림자는 위태롭다. 하지만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시인이라는 날개를 달아준 신문. 빛이 되고 그림자가 되어주었다. 지나온 길에 함께할 수 있어서, 함께 갈 수 있어서 든든하고 고맙다.

정확과 공정을 바탕으로 독자의 곁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신문이 되길 바란다.

새벽, 인기척에 귀 기울이면 톡! 하는 소리. 문을 열어 맞이하는 하루다, 광주매일신문이다.

고영서 시인은…
전남 장성 출생.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기린 울음’, ‘우는 화살’ 등이 있음. 현재 광주전남작가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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