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9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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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와 초등화 / 천세진

  • 입력날짜 : 2021. 03.08. 17:48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이재영·이다영 자매가 일으킨 ‘학폭 폭풍’의 여파 속에서, 이제 겨우 25살이고, 어린 시절에 벌인 일에 대해 비난이 과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국가대표 박탈이 과도하다는 의견이 30% 가까이 나왔다. 그런 의견과 여론조사를 보면서 끔찍하다는 생각과 우리 사회가 ‘가해자의 사회’에서 벗어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는 범죄를 다루는 방식에서 ‘추상화’와 ‘초등화’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모든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한다. ‘추상화’는 한 사람의 유일하고 소중한 존재인 피해자를 생각하지 않고 범죄 그 자체만을 추상적으로 평가하는 개념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데, 범죄의 ‘추상화’는 ‘가해자의 사회’를 만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추상화’가 일어나면 오롯한 인격적 존재인 피해자가 사라지고, 범죄를 심리학적, 사회학적, 정치경제학적 근거들을 이용하여 판단한다. 가해자가 몇 살이고, 어느 시기에 벌어졌고, 처음 저지른 일이고, 심리 상태가 어떠했고,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고 등등의 것들이 판단에 작용한다. 문제는 그런 요소들이 피해자의 고통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초범이나 유명인, 심리상태가 불안정한 사람에게 살해당했다고 해서 피해자가 다시 살아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범죄의 추상화는 가해자와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형벌 제도는 피해자가 입은 피해에 준하는 처벌이 있어야 한다는 ‘등가(等價)의 원칙’에서 출발했다. 현시대에도 함무라비 시대처럼 ‘눈에는 눈’ 식으로 처벌할 수는 없지만, 피해자가 받은 피해와 고통을 가장 먼저 배려해야 한다. 고대시대처럼 완전한 등가는 아니더라도 납득할 만한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게 원칙이지만 ‘추상화’는 등가의 원칙에서 손쉽게 달아나게 만든다.

오랫동안 ‘가해자들의 사회’로 존속하다 보니, 가해자들이 형량을 줄일 장치는 많지만, 피해자들을 위한 배려와 보호 장치는 형편없는 수준이다. 여전히 가해자들이 법망을 빠져나가고 선처를 받는 모습이 일상적 풍경이고, 피해자들이 상처와 피해에 상응하는 위로를 받고 보상을 받는 풍경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물다.

‘초등화(초등학생화)’는 사법부와 공직사회에서 대표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사법부는 범죄를 단죄하면서 범죄자는 물론이고, 국민들까지 모든 걸 가르쳐야 하는 초등학생처럼 대한다. 대표적인 증거가 반성문이다. 가해자들은 구속이 되면 수십 수백 장의 반성문을 재판부에 제출한다. 피해자가 아닌 재판부를 향한 반성문은 형량을 줄이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연구한 한 자료에는 AI 기술이 현실 시스템에 도입될 경우 사라지는 직업 중에 판사가 있었다. 그 이유는 피해자들이 입은 범죄 피해에 초점을 맞추면 범죄자에 대한 구형 형량은 수학이 아니라, 산수처럼 간단하게 도출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범죄에 대한 판결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재산, 인권, 삶, 생명에 어떤 해를 끼치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냉정하게 판단해 형을 결정하면 된다. 범죄자의 반성문 제출과 태도를 보고 형량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반성문 제출과 그것이 판결에 영향을 미치고 상황은, 재판관과 재판정은 교사이고 일반국민들은 초등학생이라는 기괴한 인식을 대변하는 것이다.

공직사회에는 징계라 할 수도 없는 ‘주의, 경고’가 존재하고, 실질적 징계도 ‘견책’에서 시작한다. 견책은 ‘업무상 과오를 저지른 공무원에게 꾸짖고 타일러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징계처분’이다.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업무상 과오에는 손실과 피해자 발생이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주의와 경고를 하고 꾸짖고 타이르는 관대함을 보이는 것은 동료 챙기기의 한편에, 대상을 초등학생처럼 여기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가 보여주는 인식 형태는 그 사회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모습까지를 결정한다. ‘추상화’와 ‘초등화’는 정의롭고 책임의식을 가진 사회와는 거리가 먼 미성숙한 인식이다. 젊은 세대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고 기회만 되면 나라를 떠나려는 배경에는 경제적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고 책임을 공정하게 묻지 않는 기득권층과 구세대의 인식에 대한 혐오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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