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엽기(獵奇)의 사회학 |
| 2005년 01월 28일(금) 00:00 |
이춘성 논설실장
요즈음은 신문을 펼쳐보기가 두렵다. 특히 사회면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신생아를 청부납치하고 그 생모는 살해해 암매장한 심부름센터의 '묻지마' 범죄와 바람난 주부의 반인륜적인 행각에서는 인면수심의 극치를 본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아기는 자신의 생모를 살해한 원수을 어머니로 알고 자랄뻔했으니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못할 노릇이다.
'희대의 살인마'라고 일컫는 유영철의 반인륜적 범죄행각에 대한 두려운 기억이 채 잊혀지기도 전에 벌어진 최근의 흉악스런 범죄들을 접하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엽기(獵奇)의 사회화'와 그 진화(進化)다. 국어사전에 '기괴하고 이상한 일에 흥미를 느끼거나 즐기는 현상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개념'에 불과한(?) 엽기는 어느새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서 있고, 더욱 기괴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섬뜩해져가는 엽기문화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면 이 '엽기'만큼 많은 자료들이 모아져 있는 단어는 아마 드물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정보화에 따른 인터넷의 급속한 확산과 획일화된 기성문화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비주류문화, 즉 신세대로 불리는 청소년들의 도전의식이나 일탈의식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하향식인 기존의 문화와 (적어도 인터넷상에서 만큼은) 평형식인 청소년들의 문화차이에서 나온 결과"일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엽기는 "가벼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일회성 놀음이 대부분이고, 실제로 변태적인 속성에 이끌리는 청소년들도 소수이기 때문에 다양한 창조적 상상력이 숨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 준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같은 엽기문화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대중과 청소년 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방법이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결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과 3∼4년전 국어사전 한 귀퉁이에서 튀어나온 엽기는 기괴하고 이상한 일에 대한 흥미의 차원을 순식간에 넘어서 가볍거나 무겁거나, 썰렁하거나 황당하거나, 허탈하거나 재미있는 모든 것들을 담아내더니 이제는 우리사회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의 표본을 일컫는 대명사로 진화해버렸다. 자살사이트나 자신의 몸을 광고판으로 내건 엽기적인 인터넷사이트를 비롯해 엽기광고, 엽기개그, 엽기게임, 엽기영화, 엽기예술, 엽기소설 등으로 표현되는 종전의 엽기문화야말로 이제는 '기성문화'다. 그 대신에 엽기는 반인륜적이고 뒤틀린 인간성의 표출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고, 그 심각성에 대한 진지한 대처가 없다면 그야말로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또다른 섬뜩한 모습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소중한 가정 해체 막아야
중대장이 훈련병에게 인분을 먹인 일은 전형적으로 엽기적이다. 하지만 손녀뻘의 열두살 중국 동포 소녀를 입양해 2년여 동안 무려 140여 차례나 성폭행한 70대 노인이나,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의 아내와 다섯살배기 아들을 살해한 뒤 이를 뺑소니로 위장한 40대에 대해 똑같이 엽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정도가 너무 잔인무도하다. 우리사회의 엽기문화는 이제 더 이상 감내할 수도, 방치할 수도 없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신생아를 청부납치하고 생모는 살해 암매장한 사건의 계기는 바로 가정을 버리고 탈선한 주부의 탐욕이다. 가족을 뺑소니로 위장해 살해한 일이나 중풍으로 거동을 못하는 친아버지의 대·소변 수발에 불만을 품고 목졸라 살해한 뒤 병사(病死)로 위장한 40대 패륜아 사건 역시 물질만능주의와 도덕불감증이 만연된 우리사회의 급속한 가정해체가 빚어낸 엽기적인 사건들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가정뿐 아니라 남의 가정까지 파괴하고 무고한 생명까지 앗아가는 황폐한 인간상의 끝은 공멸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렵고, 그래서 모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정까지 해체된다면 그 사회는 가능성이 없다. 가정은 모진 삶일지라도 그 마지막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최근 벌어진 반인륜적인 엽기범죄행각에 대해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의 가정과 사회에서 도덕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이제 절실하게 필요해져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