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고향] 청아한 바람 속에 풍류·의기 넘쳐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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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2월 21일(월)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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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풍류와 정신을 이야기 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소재 중 하나로 정자를 꼽을 수 있다. 청아한 바람이 늘 소통하는 그 곳은 쉼과 여유를 즐기는 장소이지만, 상당수는 저항과 투쟁의 공간으로도 그 역할을 해 왔다. 물론 학문과 시문의 터전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주로 강가나 산언덕에 자리 잡은 정자는 지금도 그 기능을 충실하게 유지하고 있다. 건립 목적에 따라 그 역할과 명분도 분명하다. 과거 그곳에서 행해졌던 정자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역사적 일상성이 관통하면서 현대에서도 그 존재 의미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담양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고, 나주·함평·강진 등 남도 어디를 가더라도 언덕배기나 강가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정자를 만날 수 있다.
나그네는 지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쉬면서 숨을 고르고, 마을사람들은 그 곳에서 온갖 소재를 화제로 올리며 얘기꽃을 피워 낸다.
호남문화연구소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남에만 모두 639개소의 누정이 현존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나주에 59개, 함평 80개, 영암 68개, 화순 63개소 등 거의 지역마다 정자가 산재해 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문화재로 지정됐다.
멀리 갈 것 없이 장흥군을 관통하는 탐진강 주변만 찾아가 보자.
장흥읍을 기점으로 반경 7-8㎞의 좁은 공간 속에 강을 끼고 8개의 정자가 군데군데 들어서 있다. 사인정·독취정·흥덕정·창랑정·부춘정·경호정·동백정·용호정이 탐진강 물길을 에돌아 감싸고 있다.
정자가 세워진 사연도 제각각이다. 효(孝)를 상징하거나, 의로움을 나타내거나, 풍류를 즐기는 정자 등 존재 이유가 뚜렷하다.
탐진강의 아름다운 강물을 앞에 놓고 들어앉은 정자에서 선비와 주민들은 시문과 풍류를 즐겼으며, 때로는 시국에 깊이 관여해 의병을 일으키는 등 장흥의 삶과 문화가 일정부문 이 곳을 터전삼아 이뤄졌다.
그러기에 ‘문림의향(文林義鄕)장흥’의 토대를 어느 정도 정자가 담당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는 주장에 자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풍류의 정자 동백정(冬柏亭)
꽃나무를 이름으로 달고 있는 동백정은 장동면 만년리 장항마을 옆으로 흐르는 강가에 들어서 있다. 100년쯤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룬 동산 속에 푹 파묻힌 정자는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만으로도 풍류를 즐길만 하다는 느낌이 다가온다.
이 정자는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김린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많은 선비들과 학문을 교류하고 시제를 겨루기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세 차례(1583년, 1895년, 1986년)에 걸쳐 후손들이 중수하며 이 정자를 가꿨다. 이 정자는 1715년부터 청주김씨를 비롯한 호계리 상·하민이 참석한 대동계의 집회소와 별신제(別神祭) 장소로 활용되면서 지금껏 마을의 구심적 역할을 해 왔다.
강 건너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가파르지도, 그렇다고 순탄하지만은 않은 계단을 따라 오르면 300년쯤 됐다는 동백나무가 곁에 서 있는 동백정이 맞이한다.
낮은 담장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4칸, 측면 2칸에 방을 갖춘 정자가 자연석을 주초삼아 서 있다.
앞뜰에는 키 작은 동백이 배열해 있고 그 앞으로는 기품 넘친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 소나무 틈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하늘과 내(川), 마을과 들녘은 그 자체가 그림이다.
정자 내부에 걸려 있는 송사 기우만의 편액 등 17개의 각종 편액을 찬찬히 살펴보는 재미도 오롯하다.
◇효(孝)의 정자 용호정(龍湖亭)
탐진강 상류인 용소(龍沼)의 벼랑 위에 서 있는 용호정(부산면 용반리)은 여느 정자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대부분의 정자가 풍류를 목적으로 지어진데 반해 이 곳은 효(孝)를 상징한다. 최규문 등 4형제가 아버지를 위해 지은 정자이기에 그렇다.
사연은 이렇다.
최규문의 할아버지 묘는 강 건너에 있었다. 때문에 규문의 아버지(최영택)는 비가 올 때마다 부친의 묘소를 찾아가지 못하게 됐다. 그럴 때마다 이 곳에 서서 묘를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규문이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를 위해 초정(草亭)을 짓고 부친의 효성을 기렸다. 하여 세상사람들은 이 정자를 두고 “아버지를 뵙기 위한 정자(望親之亭)요, 또한 아버지를 위로하는 정자(慰親之亭)”라고 불렀다.
탐진강을 바로 눈앞에 두고 들어앉은 용호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에 낮은 자연석 주초위에 세워진 단아한 정자다. 내부에는 노사 기정진의 용호정기(龍湖亭記)를 비롯, 이곳의 아름다움과 애뜻한 사연 등을 시문으로 표현한 편액 20여개가 걸려있다.
◇의(義)의 정자, 사인정(舍人亭)
탐진강 상류에서 시작한 장흥지역 정자기행은 사인정에서 마무리된다. 설암산 중턱에 자리잡은 사인정을 경계로 강진땅에 들어선다.
이 곳은 예로부터 의(義)의 정자로 불렸다. 건립 이유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주인공은 조선조 세종 때 홍문관 우제학, 전라도관찰사, 이조참판을 지낸 설암 김필이다.
그는 1453년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그 높은 벼슬을 던져버리고 장흥으로 내려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신하로서 의를 지키면서 후학들을 길렀던 터전이 바로 작은 정자 사인정이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나 후손에 의해 몇 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곳엔 또한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도 남아 있다. 정자 왼쪽 바위에 ‘第一江山(제일강산)’이라는 한자가 힘있게 새겨져 있다. 이는 김구 선생이 중국 상해임시정부 망명길에 이곳에 들려 남긴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다./특별취재반
맑은 바람 맞으며 신선이 되자
기고/장모창 장흥군 학예연구사
장흥 하면 탐진강·천관산·동학·토요시장·우드랜드·문학·정자문화 등이 떠오르게 된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장흥의 정자문화를 제일로 꼽고 있다.
장흥의 정자문화는 탐진강을 중심으로 강 주변에 8정자가 건립돼 예부터 장흥에는 정자문화가 형성됐으며, 나아가 장흥이 내세우는 문림의향의 토대가 된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자연경치가 빼어난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정자문화가 발달했는데, 자연을 이용가치로 생각했던 서구의 사고방식이 아닌 모든 물물과 자연을 하나로 생각하는 우리 선조들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과 벗하고 싶어 하는 생각 때문에 사방에 트인 그늘집을 지은 것이 정자이다. 장흥 또한 정자들이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다.
장흥 정자들의 공통점은 탐진강 주변의 나지막한 언덕위에 강을 바라보고 세워져 마치 자연과 건축이 하나 됨을 느끼게 하여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순응 하면서 살아가는 건축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장소이다.
또한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한 황홀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더불어 정자에 걸린 수많은 현판을 통해서 옛 선조들을 만나는 줄거움을 느끼는 동시에 당대의 유명한 명사인 송사 기우만(1846-1916), 연재 송병순(1836-1905), 노사 기정진(1789-1879) 등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일상생활에 지친 많은 현대인들이 장흥의 정자문화 탐방을 통해 그림 같은 누각에서 맑은 바람 맞으며 신선이 되는 기회를 가져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별취재반
▲이경수 정치부장 ▲오성수 특집기획부장 ▲김재정 사회부 차장대우 ▲김기식 사진부 차장대우 ▲정다운 문화여성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