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봄은 오는가 박준수 편집국장

2012년 03월 06일(화) 00:00

어제 경칩날 남도에 비가 뿌렸다. 겨우내 잿빛으로 가라앉았던 무등산이 푸른 기운이 감돌며 한발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다. 이제 봄이 머지않은 것같다.

올해는 유독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다름아닌 4·11 총선 출마자들이다.

총선 예비후보자들은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거리와 재래시장, 터미널 등 다중장소를 누비며 얼굴을 알리느라 신발이 닳도록 발품을 팔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4월 봄날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성지순례라도 하듯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어제 민주통합당이 호남지역 경선대상자를 발표했다. 비민주 2곳을 제외한 지역구 28곳 가운데 불법 선거인단 모집의혹이 불거진 광주 동구를 포함 모두 13곳의 현역의원이 탈락했다. 현역의원 28명을 기준으로 하면 46.4%, 지역구 30곳을 기준으로 하면 43.3%의 현역이 물갈이 됐다. 앞으로 국민경선을 통해 한명으로 압축되면 현역교체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설로만 떠돌던 ‘호남지역 대폭 물갈이’ 전망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같은 결과는 그동안 인적쇄신에 대한 지역민의 요구가 컸고 민주당이 공천심사 기준으로 제시한 ‘정체성’의 잣대가 적용된 결과로 풀이된다.

그런데 경선대상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구 민주계의 퇴조와 친노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김영진, 최인기, 강봉균, 신건 등 탈락한 현역의원들이 대체로 구 민주계 출신이다. 또 공천이 보류된 광주 서구갑은 특정학교의 인맥을 심기위한 의도가 짙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공천발표 이후 뒤숭숭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지역민들은 민주통합당 지도부가 과연 호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고 있다.

컷 오프의 주요 잣대로 적용된 ‘정체성’이 정작 지역민의 가치 프레임과 일치하는가도 따져봐야할 대목이다. 민주당은 정체성 평가를 통해 공천 신청자가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남북문제 등에 대한 민주당의 비전과 정책을 얼마나 공유하고 추구하느냐를 검증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표된 공천대상자를 보면 정체성을 제대로 검증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민주당 공심위는 그동안 1, 2차 공천심사에서 도덕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보겠다는 말과 달리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임종석 사무총장과 저축은행 비리로 기소된 이화영 전 의원을 공천해 비난을 자초했다. “민주당의 공천심사 기준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어서 감동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다”는 주장이 빈말이 아닌 듯 싶다.

정체성이란 사전적 의미로 어떤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 또는 그 특성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학이나 마케팅에서는 정체성(identity)에 대응되는 개념을 이미지(image)라고 한다. 즉 어떤 대상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이미지이다. 민주당의 정체성이 왜곡됨이 없이 정확히 지역민의 마음속 이미지와 일치할 때 신뢰를 얻는다.

그동안 친노세력(참여정부)은 호남을 지렛대로 정권을 잡았음에도 이에 대한 부채의식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중 ‘노무현이 좋아서 지지한 게 아니라 한나라당과 이회창이 싫어서 자신을 찍은 것이다’는 발언이다. 그리고 노무현의 그림자라 불리우는 문재인 변호사가 자신의 저서 ‘운명’에 5·18에 대한 진지한 평가가 없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특히 참여정부는 후반기에 청와대와 공직사회에서 호남출신 인사를 쳐내며 서자취급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호남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간직한 한(恨)의 땅이다.

동학혁명, 여순사건, 5·18 등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오직 호남의 공간에서 전개된 역사적 사건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정유재란의 주무대도 호남이었다. 한이 많은 만큼 피해의식도 크지만 정의감과 역사인식도 투철하다. 호남의 정서와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총선구도를 자의적으로 강요할 경우 그에 대한 반작용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통합당은 좋든 싫든 호남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 정당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민주통합당의 정체성의 상당부분은 호남의 본질에 뿌리를 둬야 한다. 이를 ‘지역주의’니, ‘DJ의 유산’이니 해서 타도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공천 파열음을 잠재우고 수권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호남정신’을 곧추세우는 것이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