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당쟁 휘말린 아픔 딛고 송강문학의 꽃 피우다 광주매일신문·KCTV광주방송·광주시 공동기획 <52>무등산의 재발견-사람을 품은 산 ⑮송강정&정철(上) 무등산 자락 담양 머물며 사미인곡 등 쏟아내 정치가이자 문장가로의 삶…사림정신 결정체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2012년 12월 26일(수) 00:00

전남도기념물 제1호 송강정은 송강 정철이 1585년 대사헌으로 지내다가 당쟁에 휘말려 수년간 머물던 장소로 연군지정(戀君之情)을 읊은 ‘사미인곡’이 탄생한 곳이다.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송강정 마루에서 무등산을 바라보면 인왕봉·천왕봉·지왕봉이 한눈에 보인다. 무등산의 정기가 이곳처럼 확연하게 느껴지는 곳도 드물 것이다. 우리가 타고 내려온 그 도도한 원효계곡의 물이 여기서 큰 강을 형성하고 있는데 죽록천이라고 부르는 영산강이 지류다. 그래선가 송강정은 그 옛날 죽록정이라고도 했다.

송강정은 송강 정철이 1585년 대사헌을 지내다가 치열한 당쟁으로 인해 창평에 내려와 있으면서 경치 좋은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때 송강의 나이 50세쯤 되었고 1589년 우의정에 임명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으니 4년동안 살았던 곳이다. 바로 이때 여기서 그 유명한 ‘사미인곡’의 전후편과 많은 단가를 지었다고 하니 송강정은 송강문학의 산실이요 무등산의 기운을 송강은 잘 활용한 셈이다.

송강 정철의 6대손이 쓴 ‘송강정 중수기’에 의하면 송강정은 없어진지 오래됐고 그 자리에 공동묘지처럼 주춧돌과 잡초만 무성했다고 한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후손들이 200년 동안 쓰러져 있던 묘총을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환경정리를 한 후 죽록정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그 잡초에 묻힌 200년 동안 당시 송강정에 걸렸던 시문이나 기(記), 상량문 등은 찾아볼 길 없고 정면의 송강정이란 현판과 측면의 죽록정이란 현판만이 세월을 얘기해주고 있다.

송강정은 왜 쓰러졌을까 정말 그것이 궁금하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왜적이 와서 무너뜨릴리도 없고 이 집을 넘어뜨릴만한 비바람도 흔하지 않았을 터인데 왜 쓰러졌을까. 그리고 조선중기의 중요한 국가 인물인 그의 정자는 왜 200년 동안 방치됐을까. 혹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송강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잃어버린 200년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새롭게 생겨난다.

송강정 현판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

송강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소위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공부한 사람은 그의 시를 수십번 외우고 외워서 시험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이 골짜기를 ‘가사문학권’ ‘시가문학권’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터를 구경하러온 국문학도들의 발길이 늘면서 붙여졌다.

그러나 꼭 밝히고 싶은 것은 지금 수십개의 정자를 지나오면서 이 골짜기의 주인공은 정철이 아니라 정철을 키워낸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림정신의 산물, 사림정신의 결정체가 정철의 가사문학으로 잉태된 것이지 정철의 가사문학이 있어서 나머지 정자와 인물들이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하여튼 송강은 우리 국문학사에 정말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본업은 정치였는데도 문장가로 더 이름세를 날리고 있다.

송강은 원래 이곳 출신이 아니다. 중종조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관 유침이요 어머니는 죽산 안팽수의 딸로 송강은 4남 가운데 막내였다. 그러나 송강이 열살되던 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정씨 일문에도 화가 미쳐 매부가 모함으로 죽고 큰형이 귀양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도 귀양을 가게 됐다.

정말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집안이 풍비박산나자 송강은 어린 나이에 이곳저곳에 몸을 의지하다가 열네살 되던해 어머니를 따라 창평으로 내려와 어렵사리 살림을 꾸리게 되었다. 어머니가 창평을 택한 것은 정철의 큰아버지 정유심이 남원부사로 있을 때 할아버지 정계의 묘를 창평, 지금의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썼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호 아래 고서에 살던 송강이 광주호 위에서 펼쳐지는 이상세계에 만난 것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어느 여름날, 순천 처가에 몸을 의지하고 있던 형 정소를 찾아가려고 우리가 온 887번 지방도를 타고 올라가 충효리 맞은편 지실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지실마을 앞 환벽당 앞 청계천 용소에서 멱을 감는다.

송강이 멱을 감고 있을 때 그 위 동산에 환벽당을 짓고 살던 김윤제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용소에서 용이 꿈틀거리고 있어 나가보니 송강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한눈에 그가 비범한 기골임을 알고 가까이 불러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에 놀라 순천으로 가는 길을 만류하고 자기 슬하에서 학문을 닦도록 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송강은 맞은편 지실마을에 살면서 환벽당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설도 있다. 사실은 송강의 할아버지의 처가가 광산김씨로 송강의 아버지 정유침이 외가쪽 광산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창평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는데 이때 충효동의 대지주인 김윤제가 집안 내종간인 정유침의 딱한 소식을 듣고 송강을 맡아 가르쳐서 그의 외손녀인 유강항의 딸과 혼인시켰다는 것. 그리고 송강이 열여섯 된던 해 왕자 탄생의 나라경사로 아버지가 사면돼 이곳 원강리에서 온가족이 모여 살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송강은 김윤제의 돈독한 가르침과 식영정에 머문 면앙정 송순, 소쇄공 양산보,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 거유들로부터 학문을 닦아 26세 때 진사시에 합격 장원을 하였고 다음해에 문과 별과에 장원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가 지평에 임명되었다. 지평은 사헌부에 소속된 정5품관으로 요즈음의 검사와 같은 직이다. 송강이 지평으로 있을 때 명종의 종형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탐내 처남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명종은 정철에게 관용할 것을 부탁했으나 굽히지 않고 끝내 사형을 언도하는 바람에 그의 강직한 성품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그의 벼슬길은 승승장구였다. 지평에서 전랑, 직제학, 장악원정이 차례로 되었다. 송강이 승진을 거듭할 때 왕실은 이미 정쟁의 회오리 속에 들어가 동인과 서인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논쟁에 참여하게 된 송강은 어느덧 서인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인의 이발 등과 치열한 당파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창평에 돌아와 있던 송강은 복을 벗은 뒤 다시 관계로 복귀해 강원도 관찰사를 필두로 3년동안 전라도 등지의 관찰사로 등용돼 지방장관으로서의 치적을 쌓는 한편 ‘관동별곡’ ‘훈민가’등을 지어 시인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냈다.

송강이 전라도 관찰사로 와 있을 때다. 송강은 이 지역 백성들이 겪고 있는 생활상을 관찰하고 나서 시급히 시정을 요구하는 ‘전라감사시진폐소’라는 상소문을 임금께 올렸다.

‘무릇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인지라 백성이 기뻐하고 슬퍼함을 보고 국가의 안위를 알게 되는데 얼굴은 누렇게 떠 있으며 집안에 있는 그릇이 모두 비어있고, 한결같은 생산이 없는데 공물과 부세 이외에도 명목 없는 세금을 내야하니 징서하는 관리가 날마다 문밖에 찾아와 온마을이 떠들썩합니다. 이렇게 되니 처음은 가구를 팔고 다음은 소를 팔고 마침내는 전답과 집을 팔게 되어 세상을 한탄하는 노래가 적잖아 답답합니다. 바라옵건대 미천하고 어둡다하지 말고 계책을 세워 주십시오.’

그러나 이런 백성에 대한 원망이 어디 하루아침에 해소될 수 있는 문젠가. 임금은 뾰족한 안이 없어 그저 상소문을 읽고 말았을 것이다.

/글=남성숙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