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겐 숙고와 위로가 필요하다

박준수 편집국장

2013년 01월 29일(화) 00:00

무등산 아래 겨울밤이 유난히 길다. 긴 밤을 뒤척이는 사람들의 한숨과 기침소리가 문풍지를 뚫고 귓전에 맴돈다. 겨울바람에 마음을 베인 사람들의 비명이 을씨년스런 삭풍같다. 바람 끝은 잘 당겨진 현(絃)마냥 닿는 것마다 울림을 만들고 겨울밤의 적막을 깨운다.

대선이 끝난 지 40여일이나 지났지만 불면의 밤은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가리켜 집단적 ‘멘붕’(멘탈붕괴)상태에 빠졌다고 말한다. 마음속 잉걸이 아직 이글거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대선 결과로 인한 멘붕이 이곳 저곳에서 활화산처럼 뜨거움을 분출하고 있다.

지난주 통합진보당 안주용 전남도의원(비례)의 박준영 지사 물세례 사건은 멘붕이 빚어낸 비이성적 행동이다. 박 지사는 지난 8일 광주MBC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민주당의 대선패배로 인해 몰표를 찍어준 호남인의 멘붕상태를 치유할 대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무겁지 못하고 충동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고 발언한 게 화근이었다. 안 의원은 돌발행동 직후 “박지사가 ‘충동적 호남 표심’ 발언에 대해 선 사과가 없었으며 의사진행발언과 5분 발언 등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박 지사는 나중에 자신의 발언은 투표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견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진의와 다르게 표현됐다고 해명했다. 또 진보정당과의 연대에 반대 입장을 견지해왔고 호남총리 후보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 상황이 맞물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발언의 진의야 어떻든 아직 울화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민주당 출신 단체장인 박지사의 ‘충동적 표심’ 발언은 상심에 잠긴 호남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멘붕상태는 새누리당 호남출신 인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필자는 박근혜 당선인의 한 측근 인사와 꽤 긴 시간 휴대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정부조직개편안과 주요 업무보고에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어떻게 된 거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방분권과 균형발전 문제는 추후에 다뤄질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대뜸 호남몰표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토로했다. 새누리당이 대선기간 그토록 공을 들였음에도 민주당에게 90%에 가까운 표를 몰아준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요지였다. 또한 이렇게 실망스런 투표결과가 나온 상황에서 호남을 챙기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우려와 함께 후세를 위해서라도 극단적인 투표행태는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화통화에서 묻어나는 그의 격정적 언사에서 차기권력 핵심부의 분위기가 어떠한지 읽을 수 있었다.

이번 대선 투표를 계기로 드러난 정치지형에서 호남은 ‘섬’처럼 고립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적인 것일뿐 내면의 진면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후보는 단일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안철수 후보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박빙의 승부에서 전략적 선택이 결과적으로 극단적 투표로 나타난 것 뿐이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재임기간 5·18행사에 불참하고 호남푸대접을 한데 대한 피해의식이 투표로 연결된 것이다.

아울러 호남은 경제적으로 낙후해 외부 유입인구가 적은 탓에 지역색이 어느 지역보다 뚜렷하고 정치의식 또한 근친성향을 보인다. 역사적으로도 전라도는 근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동학농민전쟁, 광주학생독립운동, 5·18 민중항쟁은 전라도의 정체성 형성에 커다란 맥락을 부여했다. 그 본질은 정의와 시대정신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호남을 발이 닳도록 드나들며 ‘호남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고 공언했었다. 지역민 역시 그의 진정성에 감동하고 마음을 절반쯤 열어준 것은 사실이다. 물이 100。C가 넘어야 끓듯이 새누리당의 노력이 아직 임계점(critical mass)에 이르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곱사등이의 굽은 등이 보기 흉하다고 억지로 등을 펴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호남의 표심이 전국의 표심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전라도의 정체성을 강제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숙고(熟考)와 위로이다. 멘붕상태에서 깨어나 현실을 성찰하고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는 따뜻함이 필요하다.

역사의 멍에를 짊어진 전라도에도 내일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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