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단장하면 역사가 아니다 언론인의 세상읽기 나의갑 <前 전남일보 편집국장>

2013년 03월 13일(수) 00:00

1979년 10·26. 유신(維新)이 죽으면서 비상계엄령이 떨어지고 신군부라는 도둑괭이가 기어 나온다. 언론은 그 이튿날부터 계엄령이 해제되는 81년 1월24일까지 계엄 당국의 사전검열을 받는다. 광주지역 언론검열관실은 동구 광산동 전남도청 본관 2층에 있었으며, 보안대 요원 1명과 정훈 장교 5명이 검열 업무를 수행했다. 80년 5월에는 신문 발행이 얼마동안 중단된다.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 큰일이 생겨 그랬다. 신문이 속간된 건 6월2일이었고, 4일 화가 강연균은 옛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의 요청을 받고 전남도청 앞 광장에 서있는 ‘분수대’를 그렸다. 1면에 실린 그 그림은 분수대의 물줄기를 꺾어놓았고, 나무들 허리도 분질러놓았다. 광장은 광주의 피로 적셔두었고, 중천에는 검은 해를 그려 넣었다. 정훈 장교보다 계급장은 작지만 검열관실의 사실상 수장인 보안대 요원에게 1면 대장(臺狀)을 들이밀었다. 요원이 입으로 그림을 사납게 그렸다. “누굴 둘려먹으려고 그래? 일부러 물줄기를 꼬꾸라지게 해놨구만. 물줄기가 제대로 솟구치도록 다시 그리라고 해. 엎어져 있는 나무들도 모두 다 일으켜 세우고, 광장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핏물도 깨끗이 없애버려. 해는 또 왜 시커멓게 그려놨어? 내 말 안 들으면 재미없는 거 알지?” 신문사 문을 닫겠다는 중대결심이 서지 않는 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독한 시절이었다. 검은 해와 가로수 네 그루만 광장에 뉘어두고 연판에서 그의 ‘입그림’대로 말끔하게 깎아냈다. 아마도, 윤전기는 돌면서 울었을 것이다. 도는 것이 제 미션이라 중얼거리며.

광장의 한복판에 분수대가 있듯 5·18의 한복판에 분수대가 있다. 그 봄날, 분수대는 ‘분수’말고 ‘항쟁’으로 타올랐다. 공수부대(계엄군)가 5월21일 5·18 최대 격전지인 도청 앞 광장에서 퇴각하자 분수대는 ‘해방 광주’의 연단이 되었다. 22일부터 27일 새벽 ‘광주’가 죽기 전날까지 5일간 열린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 등 각종 집회의 연단으로 쓰였다. 분수대는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시민들이 잇따라 올라와 “광주를 지키자”고 울부짖으며 광주정신을 뿜어냈기 때문이다. 5·18 직전에도 분수대는 침묵하지 않았다. 14일부터 3일 동안 이어진 ‘민족민주화대성회’(광주지역 대학생 연합시위) 때 처음으로 연단이란 ‘역사의 일’을 맡았으며, 당시 그 아래로 몰려든 학생·시민은 3만명에 이르렀다. 87년 6월항쟁 때 그랬듯, 5·18 이후에도 분수대는 시국집회가 있을 때마다 민주의 무대로 활약했다. 독특하게도 ‘민주 이력’을 지닌 광주의 분수대는 그러므로, 금남로·전남도청 앞 광장·전남도청·상무대 영창과 함께 5·18의 5대 상징으로 꼽힐만하다.

분수대 위에서 꽃피운 민주가 그 얼마인데 그는 거꾸로 모독을 당했다. 두 번이나 그랬다. 그 처음은 아예 죽을 뻔했다. 88년 광주시가 금남지하상가를 만들면서 교통 흐름을 막는다는 명분 등을 들어 기획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신문이 그걸 막았다. 광주일보가 그해 4월29일 사회면 머리기사로 그 촌스러운 음모에 태클을 건 데 이어, 김종남 사회부장(전 광주일보 편집국장·전 광주비엔날레 사무총장)이 ‘5·18 민주현장 증언대를 헐어서야’라는 제목의 긴 칼럼을 써 그 속보이는 음모를 제압했다. 시가 “원형대로 보존하기로 했다”며 백기를 든 것은 5월13일, 칼럼이 나간 지 3일만이었다.

유의할 것은 ‘원형 보존’이란 시의 다짐이 깨지는 대목으로, 이로써 그는 제2의 모독을 받는다. 91년 8월 늙었다는 핑계로 그의 몸에 손을 댄 것인데, 분수노즐을 아주 배게 박아논 것이 리메이크의 전부였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발상은 ‘연단 조건 제로화’로부터 나온 듯싶다. 1층에서 3층에 이르기까지 발 딛기가 옹색스러울 만큼 노즐을 밀착시켜 심어놓은 점을 그 근거로 내놓을 수 있다. 기실, 이후로 그는 연단 자격을 잃었다.

제3의 모독, 그에게 오고 있는가. 강운태 광주시장이 최근 “분수대를 보존한 상태에서 그 주변을 새롭게 조성하겠다”고 밝혔으나 ‘원형 보존’ 약속을 깰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어, 지레 그가 걱정된다.

역사는 단장하면 망가진다. 본디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 있다. 본디여야 울림이 더 크다는 것 아닌가. 분수대, 절대 손대지 마라. 행여 페인트라도 칠할까 불안하다. 믿는다, 시와 시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