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각한다

박상원 부국장 겸 경제부장

2013년 06월 04일(화) 00:00

지난달 초 박근혜 대통령 미국 방문기간 중에 발생한 ‘윤창중 성추행 의혹 사건’이 일순간 자취를 감췄다. 하루 종일 뉴스메이커였던 ‘윤창중 성추행 의혹 사건’을 한 순간에 잠재운 사건은 다름 아닌 CJ그룹 비자금 사건이었다. 또 윤씨 사건은 한동안 주요 뉴스를 장식했던 ‘남양유업 욕설 영업’을 조용히 사라지게 했다. 이외에 포스코 에너지 ‘라면 상무’로 불거진 갑을(甲乙)관계, 최근 재벌가와 유명인들의 조세도피처 페이퍼 컴퍼니 논란 등은 모두 경제민주화와 관련돼 있다.

‘남양유업 욕설 영업’ ‘라면 상무’ 등의 잘못된 관행은 수직적 권력구조의 갑을 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갑을 관계는 당초 계약서상에 등장하는 용어다. 갑은 ‘비용을 치르고 재화와 용역을 제공받는 입장’을, 을은 ‘재화와 용역을 제공한 대가로 돈을 받는 입장’을 나타낸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갑을’은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갑은 우월한 위치에서 명령하고, 을은 이를 떠받들어야 하는 처지다. 남양유업 밀어내기 파문은 갑이 을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착취하는 문화가 곪아 터진 것이다. 희대의 국가적인 성희롱 사건인 ‘윤창중 사건’도 갑을 관계에서 비롯됐다.

지난주 인터넷 방송 뉴스타파는 국제적 탐사보도 저널리즘과 공조해 버진아일랜드 등 해외 조세도피처에 계정을 열어둔 재계, 지도층 인사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2일 현재 4차 명단까지 공개된 인사들은 전 두환 전 대통령 장남 전재국씨(54)를 비롯 이수영 OCI회장(전 경총회장), 최은영 한진해운 홀딩스 회장, 이수형 삼성전자 준법경영실 전무, 연극배우 윤석화씨 부부 등이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국내 주요그룹이 조세피난처에 설립한 법인의 자산총액은 5조7천억 원 규모다. 자산 1조원이상 민간그룹 중 조세도피지역에 해외법인을 설립한 곳은 24개 그룹. 이 가운데 SK그룹이 63개, 롯데그룹 12개에 달했다. 조세 회피를 위한 법인 설립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정보 공유와 국제 공조 여건이 서둘러 정비돼야 한다.

박근혜 정부 100일을 맞아 여야 모두 우리사회의 경제민주화 추진을 강조하고 있다. 야권은 이른바 ‘남양유업방지법’이라는 ‘을’지키기를 주요 골자로 하는 법제정에 나서고 있다. 경제민주화는 1928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보편화된 개념이다. 독일 사민당의 정강정책으로 노사관계, 사업자의 민주화, 노동자 중심의 사회보장, 사기업을 막기 위한 공기업의 협동조합 등이 주요 내용이다. 핵심은 일하는 사람이 동등한 관계로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공약했던 경제민주화도 독일의 경제민주화와 맥을 같이 한다. 사회 지도층의 윤리 경영과 도덕성, 솔선수범은 그 전제조건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저 유명한 ‘칼레의 시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기원을 한번쯤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14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때 영국군에 포위당한 프랑스의 도시 ‘칼레’는 1년 가까이 영국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만 더 이상 원병을 기대할 수 없어 결국 항복한다. 정복자 에드워드 3세는 모든 칼레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대신 반항에 대한 책임으로 시민대표 여섯 명을 처형하겠노라고 말한다. 칼레의 시민들 가운데 가장 부자와 시장, 상인, 법률가 등 여섯 명의 귀족들이 교수형을 자청하고 나선다. 여섯 명의 귀족들이 밧줄을 목에 걸고 출두하자 이에 감동한 장군들과 임신한 왕비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고 왕은 결국 죽음의 선고를 거둔다. 칼레 시와 시민들을 구한 여섯 귀족들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훗날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우리 사회 소외된 사람과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서는 갑을 관계에서 갑의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위해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의 입장에서 협의하고 상생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가져야 한다. 비자금을 조성하고, 탈세를 위한 페이퍼 컴퍼니를 조세피난처에 설립하는 행태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 모두가 잘사는 경제민주화를 위해 기업인과 정치인들, 우리사회의 지도층 스스로가 자기 위치에서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자리잡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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