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유산] “섬나라 오랑캐는 물리쳐야지 화친해선 안된다” 을사보호조약 반대 상소 ‘울분’ 광주매일신문·KCTV광주방송·광주시 공동기획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
| 2013년 11월 29일(금)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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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조선을 독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을 하자, 일본은 이에 굴복하였다. 국제 정세를 주시하던 민씨 정권도 친러 정책으로 기울었다. 일본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비상 수단을 써서 명성황후를 죽이고 친일 정권을 내세워 중단된 개혁(을미개혁)을 실시했다.
을미개혁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고 근대적 우편 사무를 실시했으며, 1895년 11월15일을 기해 단발령을 내렸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고, 일제 침략자를 타도하기 위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한말 의병의 기본 정신은 위정척사 사상으로서 그 주창자는 기정진과 이항로였다. 이들은 나라를 내집같이 지키고 임금을 어버이처럼 여겨 국모의 시해와 단발령에 반기를 들었다. 동학혁명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이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하나는 장성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의 의병이고 다른 하나는 나주를 중심으로 한 아전들의 의병이었다. 장성 의병은 기우만을 중심으로 기정진의 문인들인 기삼연, 정의림, 고광순, 김익중 등이 앞장섰다. 기우만은 1896년 1월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고 국모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원수를 갚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임금을 모셔오자고 호소했다. 기우만은 2월에 장성부의 향교에 들어가 뜻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나주로 달려갔다. 그는 나주 관찰부 참서관 안종수를 죽이고, 불안해하는 나주 의병을 격려했다. 기우만을 중심으로 한 호남 의병은 광주 향교에 본부를 두어 기삼연을 선봉장으로 삼았는데, 그가 거느린 장성 의병은 300여 명으로 기세를 떨쳤다. 여기에 해남군수 정석진과 담양군수 민종렬이 합세하여 전라도 13개 고을을 휩쓸었다.
호남의 초기 의병은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움 한 번 갖지 못하고 해산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으로 엄청난 살육과 약탈이 자행된 지 1년여 만에 다시 봉기해 민족의 분노를 터뜨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05년 11월 일제 침략자들은 을사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했다. 그리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망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국민들은 일제의 침략에 항쟁하여 민족 정기를 발휘했다. 상소 활동, 죽음으로써 항거한 자결, 언론에 의한 규탄, 밀사 파견을 통한 국권 회복 운동, 을사오적 암살 활동,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등이 있었으나 가장 격렬하고 적극적인 투쟁은 의병 항쟁이었다.
호남 지역의 의병 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은, 1907년 9월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과 거의 같은 시점을 이룬다. 이때부터 의병은 전국에 흩어져 게릴라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각 지방의 의병은 지리적 이점과 민간인들의 협조로 일제침략자와 그들의 앞잡이들을 응징하면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호남 지역의 의병 운동은 대체로 다른 지역의 의병 운동이 쇠퇴하거나 또는 침체 국면으로 전환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고조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직후 강원도와 경기도, 그리고 충북, 경북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불붙었던 의병 투쟁은 1908년에 들어서서 일제의 토벌 공세에 밀려 쇠퇴하였다. 반면에 호남 지역 의병 운동은 오히려 이 시기에 급속히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1908년 하반기 이후는 전남·북 전역이 전국 의병 활동의 중심지로 되어 명실상부한 ‘의병 전쟁’의 격전장으로 변하였다.
전라도 의병은 우발적이거나 일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계승 발전이라는 깊은 뿌리를 가진 당연한 결과였다. 충절과 의리를 기본 정신으로 삼는 호남인들, 그들은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지탱해주는 지주로서, 역사 발전의 견인차로서 그 소임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이런 호남 의병사 속에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인물이 일신 정의림(日新 鄭義林) 선생이다. 을사보호조약 반대 소장을 낸 이다.
정의림은 무등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화순 능주에서 태어났다. 화순의 이름을 화순답게 한 수많은 역사인물 중 한 사람이다. 당대 호남 최고의 선비노사 기정진 선생의 제자였다. 오늘날 ‘日新齋集’ 21권 12책을 남겨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그의 행적과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지금은 평범한 시골 촌락이 되어버린 화순군 능주면 대덕리. 1845년 11월 갑자일에 태어났다. 내내 고향에서 자습을 하다가 24살이 되어서야 노사 기정진 선생을 찾아가 본격적인 유학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김석구·정재구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다. 나중에 ‘김석구전’을 지을 정도로 김석구와는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으며 58세에 이들과 함께 스승 기정진 선생의 문집 간행에 참여했다.
이때 경상도의 권봉희와 최동민이 기정진 선생의 저서 ‘외필’과 ‘납량사의’를 비판하자 ‘그들이 비록 비판하더라도 어찌 일월같이 빛나는 노사의 지혜를 손상하겠는가. 위로 선현을 팔고 후배를 현혹시키는 폐해가 많으니 변론하여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고향에서 성리학에 빠져 노사사상을 연구하고 있을 즈음 나라 사정은 급박해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의림은 놀라고 떨려 울분을 토해냈다. 나라가 없어지다니…. 곧바로 소장을 작성하여 조정이 보냈다.
‘섬나라 오랑캐는 물리쳐야지 화친해서는 안되며, 나라의 도적은 죽여야 한다. 임금은 종묘 사직을 위해 죽을 각오로 군왕된 마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백성은 나라를 끝까지 지켜야 하며 나라를 위해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때 조정에서는 유림들의 상소를 받지 않는다며 모두 불살라 버렸다. 상심한 정의림은 제자를 가르키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의림의 나이 65세. 제자들이 스승의 유상을 남겨놓기 위해 막 조선에 들어온 사진기로 사진을 몰래 찍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정의림은 그 사진 위에다 ‘이 모습도 싫고 이 삶도 가히 측은하다. 좀이나 고기곁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썼다. 그 이듬해 10월 정의림은 스스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관을 쓰고 바르게 누워 숨을 거두었다.
남아있는 문집은 日新齋集 21권 12책이 있는데, 이중 그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잡저로 ‘변전우소저 노사 선생 납량사의 기의’와 ‘변전소우저 노사선생 외필편’이 있다. 노사의 납량사의와 외필은 율곡 이이의 성리학을 비판한 책으로 유명하다. 이에 경상도의 권봉희와 최동민이 스승 노사의 책을 비판하자 ‘스승 노사가 율곡의 설에 대해 말한 것은 전현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곡의 실수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고 반박하고 그가 노사의 입장을 따라 동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理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理란 ‘무위의 爲 불사의 使’다. 주자가 말했듯이 ‘고요한 가운데서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이 있는 것’을 말한다. 형체가 없는 理를 가지고 시시비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그는 공자와 노자의 말을 빌려 다시 설명했다. 공자는 ‘하늘이 만물을 낳을 적에 심는 자를 배양하고 기우러진 자를 넘어뜨린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는 ‘배후에 어떤 것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만물이 자랄 때에 스스로 성장해감은 흡사 어떤 물건이 있어 그것을 부지하는 것과 같고, 그러다가 그 쇠퇴함에 미쳐 스스로 소멸해감은 흡사 어떤 물건이 그것을 밀어넘어뜨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치가 스스로 이와 같은 것이다’고 했다. 또 주자는 ‘마음이 능히 본성을 점검한다’고 했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理로 본 정의림은 氣만을 내세우는 비판자들에게 理氣의 조화를 강조했다.
화려한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조선 후기 성리철학의 맥통을 이어 발전시킨 선비 정의림. 조선 천지에 이름을 크게 내지 않았지만 이웃한 장성·담양·화순지역 청년들의 정신적 지주로 작고도 아름다운 삶은 살다간 어른이었다.
/글=남성숙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