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유산] 바다생물 정보 담은 ‘자산어보’ 치밀한 고증 돋보여 광주매일신문·KCTV광주방송·광주시 공동기획 |
| 2013년 12월 13일(금)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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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을 품어낸 무등산은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형 손암 정약전(1758-1816)까지 품어냈다. 손암은 1777-1779년 2년 가량 화순에 머물면서 무등산을 탐닉했다. 손암은 과거시험을 보기 전 전남 화순군에 머물면서 학문을 쌓았다. 1777년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화순현감으로 부임할 때 아버지와 함께 화순에 왔다. 화순에 살면서 동림사(東林寺·과거 화순읍에 있었던 절)에서 다산 정약용과 상당한 학문을 쌓았다.
정약용은 형과 함께 무등산과 화순 동복(同福) 적벽(赤壁)을 유람하며 느낀 감상을 몇편의 시(詩)로 남기면서 ‘부지런히 애써 서경(書經)을 읽어야 어버이 바람 넉넉히 채워 드리지. 차마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중형(정약전)과 함게 풍경 소리 들었노라…. 젊은 시절 재주만 믿고 있다간 나이들면 대부분 바보스럽지. 이를 경계해 느리거나 소홀히 말자꾸나, 가는 세월 참으로 허무하거니’라며 젊은 시절 학문을 닦는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즈음 1779년 성호학파의 거두 권철신이 광주 천진암에 공부방을 열었다. ‘서학교리연구회’라는 이 공부방에는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이중에 손암 정약전도 있었다. 이 공부방이 후에 한국 역사를 역동적으로 흔들어 놓을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약전은 175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정약전은 네 살 아래의 동생인 정약용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인지 정약용의 문집에는 정약전에 관한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정약전은 특히 서양의 학문과 사상에 심취한 이벽(李檗), 이승훈 등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이들을 통해 서양의 역수학(曆數學)을 접하고 나아가 천주교에 마음이 끌려 이를 신봉하기까지 하였다.
정약전은 17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1798년에는 왕의 명령을 받아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2)를 편찬했다.
정약전은 정약용과 때로는 학문을 논하고 때로는 산수를 유람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1778년 겨울,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두 형제는 함께 화순 동림사에 머무르며 독서를 하였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정약전은 상서(尙書)를 읽었고, 정약용은 맹자(孟子)를 읽었다. 이때, 정약용은 ‘맹자’에 나오는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정약전에게 물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공부하는 동안 정약용은 정약전에게, “중이 중노릇을 하는 이유를 내가 지금 알았습니다. 부모 형제 처자의 즐거움이 없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女色)의 즐거움이 없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고통스럽게 중노릇을 합니까. 진실로 그와 바꿀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가 학문을 한 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 같은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까”라 하였고, 정약전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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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두 형제는 천주교와 거리를 두게 되었으나, 반대파들은 한때 천주교에 몸담았던 그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정약전과 정약용을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렸다. 스승 권철신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을 당했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되었다. 신유박해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이배 되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귀양길을 떠났으나, 나주(羅州) 성북(城北) 율정점(栗亭店)에 이르러 손을 잡고 서로 헤어져 각기 배소(配所)로 갔다. 그들은 알았을까?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이별이었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이때 남긴 정약용의 시는 우리에게 더 애틋함을 느끼게 해준다.
‘제일 미운 것은 율정점의 문 앞길이 두 갈래로 난 것이네/원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낙화처럼 뿔뿔이 흩날리다니/천지를 넓게 볼 양이면 모두가 한 집안이건만 /좀스레 내 꼴 내 몸만 살피자니 슬픈 생각 언제나 끝이 없지’
정치판의 끝없는 정쟁은 다름 아닌 권력 다툼이자 상대방 죽이기의 패악한 싸움이다.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재판결과에서 판명되었지만 시파·벽파의 혹독한 정쟁에 말려들어 고달픈 귀양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정약전 형제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문화와 역사는 얼마나 빈약했을 것인가. 동생 정약용에 가려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정약전이야말로 다산이 학문적으로 제일 믿고 따르던 형이었다. 깊이와 넓이를 함께 갖춘 학문, 치열하면서도 온후한 삶의 자세,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던 선비정신, 정조의 개혁이 나라와 백성을 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실천적 지식인, 자산 정약전의 생애는 시대를 뛰어넘는 가르침을 준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전을 올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대상자로 최종 선정했다. 정약전이 흑산도 연해 수산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자산어보’를 저술해 우리나라 해양생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이유다.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 서적이라 할 만큼 치밀한 고증이 돋보이는 책이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각자 저술에 힘썼고, 자주 편지로 문안하였다. 먼저,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직접 해양 생물을 관찰하고 정리하여 ‘자산어보’를 저술했다. 이 책에는 각종 수산 동식물에 대한 명칭·분포·형태·습성·이용 사실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 서적이라 할 만큼 치밀한 고증이 돋보인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저술할 무렵 정약용에게 편지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약용은 그림보다 글로 쓰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정약전은 바다에서 생활을 하는 와중에 정약용에게 조수(潮水)가 발생하는 까닭은 달에 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정약용도 유배지 강진에서 자신이 지은 책을 정약전에게 보내 충고를 구했다. 정약전은 동생이 보내준 책을 읽고, 같은 기질로 같은 학문을 닦았기에 생각하는 안목도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그 새로운 뜻을 밝힌 것이 내가 생각해 낸 것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아서, 곧바로 자네의 손을 잡고 내 아우야! 내 아우야!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네”라고 하면서, 기특한 동생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많은 저술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해주었는데, 정약용은 형의 조언을 따르면 의심났던 글과 서로 맞지 않던 수(數)가 모두 신기하게 들어맞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고 존경했던 두 형제. 무등산 아래서의 2년간의 삶이 유배의 슬픔으로 이어졌으나 학문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마음으로 의지하고 격려하는 서로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형제이면서도 평생을 신뢰하는 벗이자 서로의 멘토로 살았던 정약전과 정약용. 그들 형제의 삶과 저술은 조선후기 지성사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글=남성숙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