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심금 울리는 목소리로 서민 웃고 울린 서편제 명창

광주매일신문·KCTV광주방송·광주시 공동기획
<83>무등산의 재발견-사람을 품은 산 (46)김창환(金昌煥)

흥부가 중 ‘제비노정기’ 더늠 당대 최고 극찬
유성기음반 취입 등 20세기 판소리 발전 기여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2013년 12월 27일(금) 00:00
근대 5명창 가운데 한 사람인 김창환(金昌煥 1854-1927)은 무등산과 광주가 낳은 판소리 명창으로 광산구 대산동에서 태어났다. 명창 이날치, 박기홍과는 이종 간으로 어려서부터 서편제(西便制) 명창인 청창업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사진은 서석대(위)와 입석대 모습.
광산구 삼도동에 건립된 김창환 기념비.



판소리는 판과 소리가 합쳐진 단어다.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소를 의미하고 ‘소리’는 우리나라 전통 민속 음악을 말한다. 즉 판소리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부르는 노래’를 의미한다. 조선 중기 이후 남도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판소리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대변해 주는 전통 음악이다. 판소리는 소리꾼과 북을 치는 고수가 이끄는 행사였지만 단순히 청중이 구경만 하는 공연이 아니라 공연자와 청중이 하나가 되어 공감하고 즐기던 문화였다.

특히 판소리에는 서민들의 정서와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다. 또한 당시 사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 보여 주었다. 우리 문화가 녹아 있는 판소리는 독창성과 고유성을 인정받아 2003년 유네스코 무형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한국의 대표 소리인 판소리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그 중심에는 무등산 자락에서 일러난 판소리부흥이 한 몫을 했다.

판소리도 전승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변이 과정을 거쳤다. 판소리 변이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창조적인 음악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변이였다. 창조적인 음악가는 자신이 배운 대로 하기보다는 이를 더 나은 형태로 바꾸고자 한다. 부단히 보다 더 나은 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진다.

판소리를 안다는 분들이 판소리 ‘제비노정기’는 ‘김창환의 더늠이다’라고 한다. 김창환(1854-1927)이 특별히 멋있게 고쳐 불러서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다. 김창환 선생의 제비노정기 더늠은 판소리 분야에서는 기본으로 읽힌다.

▲김창환(金昌煥)

무등산과 광주가 낳은 판소리 명창 김창환은 광산구 대산동 양화마을에서 태어났다. 동네 모습이 바구니 속 같이 아늑하여 터가 좋가로 이름 높았다. 이 동네에서 기억하는 김창환의 얼굴 모습은 이승만 전 대통령하고 똑같았다고 한다. 사마귀 있는 것도 같았다. 임금님이 손잡았다 해서 금팔찌를 끼고 다녔다고도 전한다.

잘 알다시피 김창환은 이날치와 이종 간이며, 그로부터 서편제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유성기 음반을 취입한 최고령 명창이므로 그의 소리는 서편제의 본래 모습을 이해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김창환의 소리는 처음 들으면 동편제 같은 느낌을 준다. 김창환은 성음이 우람하고 호방하며, 가풍이 엄정하고 늠름하여 계면조 선율을 마치 우조 악상처럼 부르기 때문에 청승맞은 느낌이 전혀 없고, 대신 거대한 스케일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교하고 미묘하게 선율을 운용하면서 장식을 다는 것은 그의 소리가 왜 서편제인가를 알게 한다.

그렇지만 김창환의 제자로 알려진 오수암이나 정광수에 이르면 호방하고 엄정한 기운을 줄어드는 대신 구성지고 애처롭고 정교하고 화려한 맛을 점점 더해간다.

어떤 명창의 소리를 규정하는 것은 대체로 지역과 가계이다. 판소리는 서사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지역적 방언을 바탕으로 출발한다. 광주 명창이 판소리를 하면 광주 말을 쓰고, 남원 명창은 남원 사투리를 쓴다. 김창룡은 서천 사투리를 썼고, 박록주는 ‘항능묘’나 ‘믿 해(몇 해)’ 같은 선산 사투리를 쓰면서도 판소리를 기막히게 했다. 판소리는 전라도 방언으로 해야 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고, 사실에도 어긋난다. 그러나 사투리는 아니리의 문제요, 어휘의 문제이다.

‘음악’은 어떠한가. ‘소리’ 역시 이치는 같다. 말에 사투리가 있듯이 소리에는 ‘토리’가 있다. 서울 소리조면 ‘경토리’요, 전라도 소리조면 ‘육자배기 토리’요, 경상도·강원도 소리조면 ‘메나리토리’요, 평안도 소리조면 ‘수심가토리’이다. 누구든 노래를 부르면 자기 토리로 부르는 법이다. 경상도 사람은 죽어도 육자배기가 안 되고, 전라도 관대는 수심가를 못 부른다. 교류가 적었던 시대에는 더욱 지역적 특성이 뚜렷해서 다른 지역의 음악이 들어오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자기 식으로 바뀐다. 아무리 ‘바람 풍’ 해도 남이 들으면 ‘바담 풍’인 것이다.

명창이란, 판소리 명창이란, 판소리 기량이 탁월하고 그 소리가 정통성과 역사성이 있고 내세울만한 개성적인 더늠이 있으며 감상층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고 판소리 발전에 뚜렷하게 기여한 소리꾼을 말한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김창환은 타고난 명창이요 남도 서편제를 무등산풍으로 완성한 이다. 어린시절 이날치 명창에게 가문소리를 습득한 후 정창업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신재효 문하에서 지침을 받아 자신의 판소리 세계를 완성했다.

그는 1902년 고종 즉위 40년 예식을 위해 봉상사 내에 설치된 협률사 주석으로 발탁되어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인정받았다. 1902년 고종황제의 등극 40돌을 기념하는 칭경예식 때 쓰려고 서대문 안에 건립된 원각사(당시에는 협률사라 불렀음)라는 현대식 극장에서의 공연이 콜레라 때문에 그리고 이듬해(1903)는 흉년 때문에 지연되자, 협률사에서 판소리·잡가·무용 등의 종목들로 일반 대중공연을 진행하게 됐다. 그때 김창환은 송만갑·이동백·염덕준 등과 함께 판소리를 새로운 형태로 만든 창극(唱劇)을 시도하였다. 1905년 배우조합을 조직하고 전국의 유명한 소리광대를 모집했다. 총지휘는 김창환이 맡았고, 조합장은 명고수 강재옥이 맡았으며, 배우는 송만갑·이동백·염덕준 등이었다.

1908년부터 원각사 시절 창극활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5년 3월 설립된 경성구파배우조합에 선생으로 참여했다. 1908년 12월1일 원각사에서 ‘은세계’ 공연 때 창부로 출연하였다. 1909년 원각사의 폐지 이후 그가 조직한 김창환협률사(金昌煥協律社)라는 사설 유랑창극단에서 강용환·유성준·김채만 등 50여명의 단원과 함께 주로 지방에서 공연활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후 경상도 남해 공연을 끝으로 해산하였다.

1913년 3월 장안사에서 흥행하는 구연극에 송만갑 명창 및 채란 등과 출연하였다. 1915년에 설립된 경성구파배우조합의 선생이었던 그는 9월 이동백 등과 함께 유성기음반에 취입했다. 그가 부른 춘향가와 ‘흥부 가난타령’은 미국 빅타사의 음반에 전한다. 그가 취입한 적벽가는 일축(日蓄)조선소리반에, 그리고 그가 취입한 춘향전의 ‘과거보는데’와 단가 ‘고고텬변’ 등 여러 눈대목은 일축(日蓄)제비표 조선레코드에 전한다.

1923년 7월 동정음악회가 천도교회당에서 열렸을 때 김영환·최동준·홍난파와 함께 출연했고, 1926년 11월21일 광무대에서 열린 명창대회 때 출연했다. 1930년 설립된 조선음률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각종 명창대회 국악방송에 참여해 자신의 특장 대목을 불렀다. 특히 여러 회사의 음반에 장기 대목을 다수 취입해 20세기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4년 향년 85세로 사망하였다.

김창환의 판소리 정립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시기는 이날치 명창에게 가문소리를 익혀 판소리의 기초가 닦여진 입문기이고 둘째 시기는 정창업 명창에게 본격적인 판소리 수업을 받아 김창환제 판소리가 자리잡힌 형성기이고 셋째 시기는 신재효의 문하에서 판소리 이론과 실기에 대한 지침을 받아 김창환제 판소리가 확립된 완성기다.

김창환은 어린시절부터 집안 내력으로 자연스럽게 판소리 수업을 했다. 그의 예술적 재능은 모계로부터 물려받은 피내림이다. 김창환은 가문소리를 이종형인 이날치 명창에게 배웠다. 따라서 김창환 가문소리는 무속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서민적 성격이 강한 소리, 이날치에게서 배운 고제 서편소리로 가문소리였던 것이다.

김창환은 가문소리를 익힌후 서편제 정창업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서편제 창시자 박유전 문하에서 5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일가를 이룬 정창업은 김창환에게 진양조로 부르는 춘향가의 독특함을 물려준다.

정창업 명창에게 여러해 판소리를 배워서 상당한 수준에 이른 김창환은 신재효 문하에 가서 이론과 실기에 대한 지침을 받아 자신의 소리제를 완성했다. 김창환은 판소리의 정립에 문학적 층위는 말할 것도 없고 음악적 층위와 연극적 층위까지 신재효의 영향을 입업다.

특히 김창환은 음반 취입이나 공연, 라디오 방송에 단가 ‘고고천변’ ‘남한산성’ ‘죽장망혜’ ‘장부한’을 내세웠고 판소리로는 춘향가의 ‘이별가’ ‘어사발행’ ‘농부가’ 흥보가의 ‘중타령’ ‘박타령’ 등을 장기로 내세웠다. 현재 전하는 그의 음반을 통해 그의 소리는 요즈음의 서편제 소리와 다른 고제 서편소리로 다른 맛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창환의 소리는 요즘 소리보다 매우 고졸하고 담백하며 질박한 면보다는 품위 있는 쪽으로 다듬어져 있다.

김창환의 판소리는 후에 김창환-김봉학, 김창환-박지흥, 김창환-박성환으로 계승되었고 그후 김봉학의 소리는 오수암 정광수로, 박지흥 소리는 박동진으로 , 백성환의 소리는 백남희로 이어졌다.

/글=남성숙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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