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소통의 힘…새로운 ‘앎’에 이르는 길 화가 박종석의 히말라야 그림여행 <18> 빙하위에서 만난 인연들 (가샤브롬 1,2봉 BC)

2014년 05월 14일(수) 19:35

박종석 作 ‘흰구름’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젖먹이 아이의 처음 배우기 공부는 걷기가 아닌가 싶다. 넘어졌다 일어서고 다시 시도해보고….

불안한 한 걸음이 완벽해 질 때까지는 주위의 도움과 응원도 필요하다. 그래서 성인이 되면 또 다른 지혜의 걷기 운동처럼 스승이나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결국 모르는 분야는 선험자나 아는 이에게 물어보거나 배우는 것은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닌 것으로 사랑과 관용(寬容)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2011년, 파키스탄 서북부 히말라야의 발토로빙하 길이는 약 60㎞로 사람이 생활할 수 없는 사막으로 현지인 가이드나 포터의 도움이 간절하게 필요했던 곳이었다.

석양의 가셔브롬 베이스캠프.

초여름에 가샤브롬 1, 2봉 BC로 상향 카라반을 할 때이다.

5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가이드 아민, 포터의 리더인 23세의 압둘라, 55세의 키친보이 마티, 20세의 포터 아마스와 26세의 마마트, 이들 5명은 잊지 못할 인연들이었다. 죽음의 산, 또는 거대하고 큰 산이라는 뜻을 가진 K2와 넓은 눈의 산, 브로드피크, 밤하늘의 그윽한 빛의 어원을 가진 가샤브롬 1, 2봉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려면 얼음과 너덜지대와 거친 빙하 길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6월 19일, 새벽 5시에 짐을 정리하고 4천700m의 사그린 캠프를 향해 길의 표시 구분이 모호한 빙하 위의 길을 소처럼 느리게 걷는다.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에서도 나는 그림 그리고 싶은 대상을 만나면 화면과 그 순간에 빠져 버리는 습관이 있다.

오전에 그림을 그리다 나의 길잡이로 책임진 사다 압둘라를 놓치고 길을 잃어버린 후 반대 방향의 빙하 계곡 안으로 들어가 2시간30분 동안 땀을 흘리며 길 찾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무인구의 전설’

빙산과 위험한 크레바스를 넘고 빌딩 같은 빙산에 갇혀 미끄러지면서 겨우 넘어 전진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간의 오지여행 경험 때문에 크게 긴장하지 않고 차분히 대처했지만 방향 감각은 전혀 없고 만일 일행을 찾지 못하고 해가 넘어가면 생명의 위험이 도사리는 지역이었다. 비상식량도, 비박할 수 있는 장비도 갖춘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때 뾰족한 대안이 없는 암담한 순간 순간이었다.

그 때 어디선가 사람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자갈과 암석이 섞인 작은 빙산 꼭대기에 올라 두리번거리니 2㎞정도 거리에서 사다 압둘라가 부르며 손짓을 한다. 아! 이제 살았네? 라는 중얼거림이 절로 나오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서로 다가가 그를 만나 악수하고 정상코스가 정해진 길옆에 위치한 강구리캠프 군인들의 기지에 도착한다. 10여명의 군인들이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데 여러 개의 플라스틱 통을 두들기고 장단에 맞춰 흥겹게 노래를 부른다. 한 군인이 물 한 잔을 권한다. 긴장이 풀린 안도감 때문인지 꿀물 같았다. 그사이 압둘라는 나보다도 더 긴장한 표정으로 말 두필을 대기해서 나에게 말을 타고 가길 권한다. 그는 “돈은 필요 없다.”며 나는 매우 지쳐있지만 “충분히 걸을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완강하게 말을 타야 한다고 권유한다. 그의 친절과 배려를 거부할 수 없어 40여분쯤 말을 타고 내려서 다시 걸어 다른 강구리 간이캠프에 도착했다.

서성호 대원이 3시간을 기다렸다며 투덜거린다. 나는 미안한 마음과 함께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늦게 도착한 내력을 표현하지 않고 압둘라와 다른 포터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오후에 사그린 캠프에 도착했다. 주위 설산의 분위기는 평온했지만 임시 캠프는 왠지 냉냉한 느낌이었다.

그 날 저녁 홍대장님의 소집으로 텐트안의 회의가 9시에 끝난다. 원정대에 불편을 끼쳐서인지 가셔브롬 BC에서 2박 후 하산의 권유였다.

원래는 2달간 함께 하며 개인 가이드 및 포터 등 배당받기로 하고 개인비용을 지불했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며 원정대는 등정이 목표인 것에 차이점으로 누를 끼쳐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수긍하고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여행에서는 나와 타인의 생각이 상반됐을 때 판단의 잣대보다는 나의 견해를 양보하고 또한 시비 분별하지 않고 순응 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했고 사고 없이 동참한 것도 감사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감성적 활동을 하는 자유분방한 젊은 작가나 예술가들은 가끔은 현실생활에서 상식이나 규범, 상명하달의 구조를 가진 조직에 잘 융합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꽃 한포기, 개미 한 마리에 감동하고 짙푸른 하늘과 흐르는 구름을 보다가 시간의 흐름을 잊고 영롱한 별빛을 보고 자기의 소유물처럼 응시하며 황홀경에 빠져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거시와 미시를 보는 감정 기복이 큰 부류이지만 그러나 고흐가 남긴 작품은 결코 정신병자의 장난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보통사람보다 대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순수하기에 감정을 숨지기 않을 뿐이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하고 괴벽스럽기도, 눈치도 없는 것처럼 보여 진다.

당시에 개인으로는 부담되는 경비를 지출하고 동행해 조직에 적응을 못한 것은 인정했지만 대원들은 대장에게 부당함을 거론해 회의분위기가 살벌했다. 그래도 순수하게 따랐다. 그때의 일행 중 이미 고인이 된 서성호 대원, 그 후 무산소 14좌 등정의 쾌거를 달성한 김창호 대장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후에 귀국해서 5m14㎝의 대작을 가셔브롬과 발토로빙하를 주제로 한 ‘사랑과 평화를 위한 기도문’의 작품이 남았다. 작품 안에 그려진 십자가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진 포터 친구들을 모델로 삼았는데 그때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아름다운 산들의 인연에 감사할 뿐이다.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엄마가 큰 목소리로 야단쳐도 귀 기울이지 않고 다시 걷는 연습을 하는 것처럼….

나는 몇 차례 히말라야 산행 경험에서 배운 걷는 공부가 하심(下心)과 함께 이해 받기보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면 마음이 평온하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아차렸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어려움에 봉착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적당한 격려와 지원이 필요하다. 상대의 지위나 물질적으로 있고 없음의 구분을 떠나….

그 뒤 나는 힘든 여정은 쓸모 있는 곤경에서 신선한 행보로 보름간의 또 다른 사랑과 자비심을 배울 수 있는 만남이 시작되었다. 하행 카라반에서 무거운 짐과 식사제공을 한 두 포터와 키친보이 마티는 나를 친형처럼 정성과 관용을 베풀었다. 한 끼 식사가 3인분이나 되어서 버리지 않고 배낭에 저장해서 간식이 풍부해 질 정도로 호사를 누렸다. 가이드 아민 또한 외할머니의 마음처럼 극진히 배려해 주었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선물은 태양빛을 가득 받아 황무지가 된 사막이지만 노천 온천 있는 가링에서 금방 따온 싱그러운 오디 한 바구니를 선물로 받아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을 때이다. 그 달콤함을 선물한 키친보이의 나눔에는 상쾌한 웃음과 열린 마음, 곧 사랑과 평화의 기도처럼 듬뿍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터들과 하산중 기념촬영.

작가 노트…여유를 짊어진 행보

여행자에게는 지나간 어제 오늘이 쉬운 듯 하지만 내일뿐 아니라 다가올 한치 앞의 시간은 자기 뜻대로 된다는 것은 장담할 수 없다.
안주할 수 없는 긴장과 함께 냉철한 판단 외에도 마음의 여유도 가져야 한다. 도전과 응전은 차의 엑세레타와 브레이크의 관계라면 중립도 필요하다. 중립이 휴식이자 여유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