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이 이어져 오늘의 ‘광주 정신’이 되다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무등산자락 무돌길 1-4길 (각화동 시화마을-독수정) kjdaily.com

2014년 10월 09일(목) 18:28

광주시 북구 금곡동에 있는 사당.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킨 충장공 김덕령(1567-1596)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사당 뒷쪽 언덕에는 김덕령장군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가족묘도 조성돼 있다.

나는 매일 무등산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나 무등산은 늘 내 곁에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말없이 보듬어 준 것도 무등산이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하고 외경스러운 산, 무등산은 광주의 혼이자 광주를 지탱해주는 대들보다. 그래서 광주사람들은 수시로 무등산을 오른다.
무등산의 후덕함은 광주와 담양, 화순을 품었다. 예로부터 무등산 자락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사람들은 각자 다른 마을에 살면서도 길을 통해 교류하면서 공통의 문화를 이뤘다. 세월이 흘러 우리 선조들이 다녔던 옛길은 없어지거나 흔적만 남은 곳이 많아졌다. 이런 옛길을 연결해 ‘무등산자락 무돌길’이 만들어졌다. 무등산자락 무돌길은 1910년대에 제작된 지도를 기본 자료로 해 발굴·복원한 총 51.8㎞, 15개 구간에 이르는 길로 2011년 11월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무돌길은 광주의 북동쪽에 자리한 각화동 제2순환도로 아래에서 시작된다. 제2순환도로로 오르는 고가도로 옆 글로벌아파트 담벼락에 광주지역 화가들이 그린 한국화와 시편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파트 시멘트벽과 순환도로로 올라가는 시멘트벽 사이의 삭막한 길에 벽화를 그려놓아 오히려 걷고 싶은 길로 탈바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시화(詩畵)가 있는 문화마을(시화마을)’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담양군 남면 연천리 산음동 산기슭에 자리한 전남도 기념물 61호 ‘독수정’. 조선초기 서은 전신민이 처음 세웠다. ‘백이 숙제’ 고사로도 유명하다.

시화마을을 출발해 각화저수지로 오른다. 저수지 주변은 각화동 주민들의 산책로라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각화저수지를 벗어나자 도시 이미지를 금방 벗어던진 산길이다. 길은 들산재로 이어진다. 바탈봉과 군왕봉 사이 고개인 들산재는 옛날에 각화마을 사람들이 싸리를 채취하기 위해 넘나들었던 고개라 해 싸리재라고도 한다. 각화마을 사람들은 채취한 싸리나무로 빗자루, 삼태기, 바구니, 병아리 둥지 등을 만들어 양동시장이나 대인시장, 계림시장에 내다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각화동 시화마을에서 등촌마을까지의 1길을 싸리길이라 부른다.

들산재에 서니 멀리 무등산 정상인 천왕봉과 지왕봉·인왕봉이 우뚝 솟아있고, 그 앞으로 중봉·누에봉·원효봉 같은 봉우리들이 꿈틀거린다. 들산재를 넘어 신촌마을 쪽으로 내려서니 석곡천 건너로 등촌마을이 덕봉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고, 그 앞으로 논경지가 넓지 않게 형성돼 있다.

등촌마을 앞 도로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5·18 국립묘지 입구에 닿고, 제4수원지로 올라가면 충장사·무등산장으로 가거나 잣고개를 넘어 광주시내 산수동으로 넘어간다. 덕봉산 남서쪽 자락에 자리를 잡은 등촌마을은 기존의 농촌주택과 돌담, 최근에 지은 전원주택이 혼재돼 있다.

여기에서 지릿재를 넘어 충장사가 있는 배재마을까지를 ‘조릿대길’이라 부른다. 조릿대길이라는 이름은 등촌마을 사람들이 지릿재를 넘어 다니면서 무등산에서 조릿대를 베어와 복조리, 빗자루, 삼태기, 바구니 등을 만들어 광주의 시장에 내다팔았다는 옛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평촌마을에서 바라본 호남정맥 남쪽자락. 전남도교육연수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지릿재로 올라가는 숲길은 하늘 높이 곧게 솟은 적송이 그윽한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수십 년을 자기자리에서 인내하고 수행해온 나무들은 이미 선승의 경지에 이르렀다. 지릿재를 넘으니 조그마한 논배미 너머로 원효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오고, 그 뒤로 무등산 정상부인 천왕봉·지왕봉·인왕봉이 구름에 덮여 보일 듯 말 듯하다.

배재마을에서 200m 정도만 더 가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사당과 묘역이 있는 충장사(忠壯祠)가 있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담양지방에서 의병 오천 명을 모집해 출정했다. 1595년 경상도 고성지방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했으며, 이후 장문포에서 이순신 장군과 수륙연합전에 참가하는 등 진해·고성지역을 방어했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연합작전을 펼쳐 왜군을 크게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김덕령장군은 1596년 이몽학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모략으로 투옥돼 옥사했다. 나라에서는 1788년(정조 12년)에 장군의 드넓은 충효를 기리고자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는 한편,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덕봉 동쪽자락에 둥지를 튼 배재마을과 헤어져 금곡마을로 향한다. 잠시 숲길을 지나기도 하고, 다랭이논이 있는 골짜기를 걷기도 한다. 이 길은 자동차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배재마을과 금곡마을을 잇던 길이었다.

금곡마을에서는 ‘푸랭이’라고 부르는 무등산수박이 생산된다. 그래서 금곡마을을 무등산수박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등산 중턱의 안개와 이슬을 머금고 기름진 토질 속에 재배되는 무등산 수박은 향과 맛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크기도 일반 수박의 세배 정도로 크다.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계곡의 물소리가 고요히 들려온다. 숲길을 벗어나 평촌마을로 천변을 따라 걷는다. 무등산 북쪽자락에 둥지를 튼 평촌마을은 앞으로 원효계곡이 흐르고, 북동쪽에서는 소쇄원 뒤편의 호남정맥이 꿈틀거린다.

적송, 느티나무, 참나무 등이자연림을 이뤄 더없이 그윽하다.

평촌마을 앞 계곡가에는 느티나무 거목이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고, 느티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에는 마을사람들의 쉼터인 정자가 세워져 있다. 우리의 여느 마을에나 볼 수 있는 정자나무는 마을사람들의 쉼터이자 소통공간이다. 옛날 다리 역할을 했던 징검다리도 남아 있어 옛 정취를 자아낸다. 마을회관 옆 골목을 지나 푸근한 농로를 따라가니 푸른 들판 너머로 전라남도교육연수원이 호남정맥 남쪽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전남교육연수원에서 하천을 따라 내려가면 소쇄원과 식영정이 있다.

담양군 남면 소재지인 연천리에서 증암천에 놓인 산음교를 건너면 독수정 원림이다. 아름드리 적송과 느티나무, 서어나무, 참나무 등이 자연림을 이뤄 잠시 걷는 길이지만 더없이 그윽하고 사색적이다. 원림 가운데에 독수정이 앉아 있다. 독수정은 고려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이라는 선비가,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두 나라를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이곳으로 내려와 한양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정자를 짓고 은둔하며 살았던 정자다.

나는 독수정 마루에 앉아 오늘 걸었던 길을 되새긴다. 그 길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온 민초들의 길이자 불의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의(義)로운 길이다. 그 길은 의병운동으로, 동학혁명으로, 광주학생운동으로, 5·18 광주민중행쟁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바로 무등산이 품었던 ‘광주정신’일 것이다.


여행쪽지
▶ 무등산자락을 도는 ‘무등산자락 무돌길’은 광주·담양·화순에 걸친 총 51.8㎞의 길로, 1개 구간에 3-4㎞씩 15개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 그중 1길에서 4길까지는 12㎞로, 3시간 30분- 4시간 정도 걸린다.
▶ 무돌길은 광주의 북동쪽에 자리한 각화동 제2순환도로 아래에서 시작된다. 제2순환도로로 오르는 고가도로 옆 글로벌아파트 담벼락과 제2순환도로 사이에 있는 오솔길이 초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