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애환 승화시켜 맑고 소박한 향기를 내뿜다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아름다운 순례길’ (금산사-수류성당) kjdaily.com kjdaily.com

2015년 01월 15일(목) 20:26

국보 제62호인 금산사 미륵전.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했다.

스산한 겨울날, 나는 아내와 함께 금산사로 향한다. 금산사주차장에서 금산사로 가는데, 나목 상태의 고목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있다. 사람들을 금산사로 인도하는 겨울나무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용맹정진 중이다.
한때 금산사에 유폐됐던 후백제 견훤왕이 축조한 홍예문을 지나자 모악산일주문이 중생을 맞이한다. 일주문을 통과하니 하얀 고깔을 쓰고 있는 모악산이 우리를 부처의 길로 인도한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물은 불경소리에 다름 아니다.

금강문과 천왕문, 보제루를 통과하고서야 금산사의 앞마당에 도착한다. 금산사의 넓은 마당에 서니 정면으로 부드러운 산을 배경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대적광전이 육중하게 앉아 있다. 오른쪽으로는 3층 건물인 미륵전(국보 제62호)이 당당하게 서 있다.

미륵불을 봉안한 미륵전과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은 금산사의 중심 불전으로 빼어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미륵전은 현존하는 국내 사찰건물 가운데 하나밖에 없는 3층 건물이다. 미륵전은 밖에서 볼 때는 3층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통층으로 되어 있다. 대적광전은 1986년 불에 탄 것을 이전의 건물을 고증하여 그대로 지었다. 미륵전이 좁고 높은 수직형상이라면, 대적광전은 넓고 낮은 수평적인 모습으로 대조를 이룬다.

금산교회

나는 금산사에 갈 때마다 미륵전을 돌아 송대로 올라가곤 한다. 송대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이자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계단을 만들어 방등계단이라 부른다. 방등계단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석종형 부도(보물 제26호)가 있고, 그 앞에 고려 초기에 옛 백제 땅에서 유행했던 백제계 석탑인 오층석탑(보물 제25호)이 경쾌하게 솟아 있다. 송대에 서 있으니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금산사의 전각들이 방등계단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금산사에서 마음을 씻고 본격적으로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다. 금산사 아래 상가와 주차장을 지나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길가에서 금산교회가 나와 아내를 맞이한다. 금산교회로 들어서니 ‘ㄱ’자형 한옥으로 된 옛 건물과 벽돌건물이 나란히 서 있다. 금산교회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ㄱ자형 한옥교회다. 1908년에 지어졌으니, 그 역사가 100년도 훨씬 넘었다. 금산교회에는 자신의 마부였던 사람을 목사로 모신 조덕삼장로의 훈훈한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전해온다. 김제지역의 일대 부호였던 조덕삼이라는 분은 자기 집에서 마부로 일했던 이자익이라는 청년과 함께 금산교회를 개척하고 자신의 재산을 들여 금산교회를 지었다.

조덕삼 장로는 자신의 마부인 이자익을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까지 지원하였고, 이자익은 목사안수를 받아 금산교회의 제2대 목사가 되었다. 이후 자신은 장로로서 이자익 목사를 극진히 섬겼다고 한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 ‘ㄱ’자형 교회 건물로 1908년 4월 미국인 데이트 선교사가 지역주민 조덕삼, 이자익 등의 도움을 받아 건립했다. 왼쪽은 전경, 오른쪽은 예배당 모습.

동곡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강증산(1871-1909)이 모악산 동쪽 자락에 있는 대원사에서 도통한 후 9년 동안 머물며 민중을 교화했던 동곡약방이 있다. 원래는 평범한 농가의 모습이었는데, 2003년 대순진리회에서 기존 건물을 헐고 한옥으로 새로 지었다.

동곡약방에서 금평저수지 데크길을 통하여 대순진리회청소년수련원 앞까지 되돌아 나온다. 금평저수지 옆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증산법종교 건물이 금평저수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증산법본부는 강증산의 외동딸 강순임이 세웠는데, 강증산 부부의 유해를 모신 영대와 증산미륵존불상을 모신 삼청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로 옆 인도를 따라 걷다보면 뒤에서 모악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감싸주고, 바로 옆에서는 금평저수지가 평화롭다. 금평저수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원평과 주변 들판을 바라보며 제방을 내려선다. 원평리는 김제시 금산면소재지 마을로 인구라고 해보아야 500명에 불과하지만 불교,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 등 우리나라 4대 종교시설이 아름답게 공존하고 있다.

수류성당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불교시설인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금산고등학교다. 이어 원불교 원평교당으로 들어선다. 원평교당은 1925년에 설립되었고, 195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불교교당 중에서는 초기에 세워진 교당으로 제2대 종법사와 제3대 종법사를 배출한 전통 있는 교당이다. 천주교 원평성당에 들어서니 예수님께서 두 팔 벌려 우리 부부를 맞이한다. ‘힘들고 고통당하는 자여, 내게로 오라’고 하는 것 같다.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들어서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원평천 다리를 건너니 기미독립운동기념비가 서 있다. 옛날에 원평장터가 있었던 곳으로동학농민전쟁 당시인 1893년 3월에는 이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건 농민들의 봉기가 있었고, 1919년 3월 20일에는 원평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멀리서 모악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원평에는 동학과 3·1운동 같은 민족의식이 서려있고, 인간의 해방과 평화를 염원하는 여러 종교의 기운이 스며있다. 직선으로 이어지는 제방길에서는 발자국과 달팽이를 그려놓은 아름다운순례길 표지석이 길안내를 해준다.

모악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밤재를 넘어 국사봉을 솟구친다. 이런 국사봉이 원평에서부터 수류성당까지 가는 내내 듬직한 형님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밭 사이 언덕위로 수류성당의 첨탑이 바라보인다. 수류성당의 모태는 1889년 전주 전동성당과 함께 호남의 첫 성당으로 완주에 들어선 배재성당이다. 배재성당이 6년 뒤인 1895년 이곳으로 옮겨와 이름을 수류성당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 후 이 일대는 박해를 받던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들어 주민 400여 가구가 모두 신자인 교우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1889년 봄 배재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됐으며 1895년 10월 성당을 이전하고 수류 본당으로 개청됐다. 초대 신부로 베르모렐 요셉 신부가 부임했다. 동곡약방을 지나 금평저수지 옆으로 조성된 나무데크 산책로.

한국전쟁 때 성당건물이 불타고 신자 50명이 순교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이런 참극을 딛고 9년 뒤인 1959년 새로 지은 성당이 지금의 건물이다. 신자들은 전쟁 후 굶주리면서도 구호물자를 아껴서 신축경비를 마련했지만 충분치 않아 냇가에서 모래와 자갈을 채취하여 벽돌을 찍고, 지붕은 옛 성당이 불탈 때 주워 모아뒀던 함석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수류성당은 소박하되 맑고 정갈하다. 맑고 소박한 수류성당에서 고난을 의연하게 이겨낸,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교회당의 모습을 본다.

금산사에서 금산교회로, 원불교교당으로, 수류성당으로 이어진 길에는 우리의 역사가,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애환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아름답게 승화한 사람들의 숭고한 향기를 맛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길 위에 있었다.


여행쪽지
▶아름다운순례길 7코스는 금산사에서 시작하여 금산교회-동곡약방-증산법종교-원평-주평교회-화율초등학교-수류성당까지 14.5㎞로 4시간 정도 걸린다.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금산사IC → 712번 지방도로로 좌회전 → 원평 → 금산사 주차장
▶원평성당 옆 지평선청보리한우촌(063-543-0076)의 육회비빔밥, 금평저수지 옆 호수식당(063-543-0270)의 메기매운탕이 먹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