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들의 숨비소리가 현무암 돌담길에 스며있고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제주 올레 21코스 (제주해녀박물관-종달바당) kjdaily.com

2015년 04월 30일(목) 19:28

굴동포구를 지나 하도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는 백사장이 긴 해변이 있다. 그 바닷가에 잠시 머물면 파도에 멍든 푸르른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상쾌하다. 눈앞에 자리한 우도가 손에 닿을 듯 하다.

제주올레 마지막 코스를 걷기 위해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으로 향한다. 잠녀, 잠수라고도 부르는 제주도 해녀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존재로 주목받아 왔다. 해녀는 제주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을 대변한다. 이들은 전국 각처로, 심지어는 일본까지 원정을 가서 물질을 했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해녀문화를 전승하고 보존하기 위해 2006년 6월 해녀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해녀박물관에는 해녀의 생활, 해녀의 일터, 해녀의 생애를 담은 유물과 사진·영상물 등이 생생하게 전시돼 있다.
해녀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해녀들이 사용했던 불턱도 만들어놓았다. 불턱은 일종의 탈의실인데,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쬐며 쉬는 공간이다. 불턱 위쪽의 작은 동산에는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32년 구좌읍과 성산읍 일대에서 일제의 해산물 착취와 상권독점 등 식민지수탈과 민족차별에 항거하여 해녀들이 일으킨 국내 최대 규모의 여성항일운동이다. 기념탑이 자리를 잡은 위치는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해녀들의 2차 집결지이다.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에서 내려와 잠수기어선 옆을 지나 연대동산으로 향한다. 연대동산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연대가 있었던 동산이다. 솔숲에서는 봄을 맞이하여 생기를 되찾은 새들이 ‘봄의 찬가’를 불러준다. 연대동산을 넘으니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면수동마을과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면수동은 낯물마을이라는 옛 이름을 한자어로 바꾼 이름으로, 하도리 7개 자연부락 중 하나다. 집과 길, 집과 집 사이에 쌓아놓은 돌담은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경계이자, 그리 높지 않아 이웃과 정담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돌담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낯물밭길은 하도리 주민들이 밭일을 하러다니던 길이다.

밭가에 현무암으로 쌓아놓은 돌담은 유난히 바람이 많은 제주도에서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 돌담은 큰 바람을 막아주면서도 돌과 돌 사이 틈새로는 꼭 필요한 바람은 통풍이 되도록 했다.

1932년 구좌읍과 성산읍 일대에서 일제의 해산물 착취와 민족차별에 항거, 해녀들이 일으킨 국내 최대규모 여성항일운동인 제주해녀항일운동을 기념하는 기념탑.

밭가에나 골목길에 쌓아놓은 돌담은 제주도 주민들의 생활양식이 묻어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밭길을 걷다보면 돌담 너머로 붕긋붕긋 솟아있는 오름들이 가슴에 안겨오고, 푸른 바다도 드넓게 펼쳐진다. 봄에 걷는 밭길에서는 곳곳에 핀 유채꽃들이 눈을 부시게 한다. 노랑 유채꽃은 검은 현무암과 어울려 더욱 화사해졌다. 유채꽃은 바다와 만나 에메랄드빛 바탕에 노랗게 채색을 한 수채화가 되었다.

길을 걷다가 복원된 별방진을 만난다. 별방진은 1510년 제주목사 장림이 왜구가 접근하기 쉬운 우도를 방어하기 위해 김녕방호소를 이곳 하도리로 옮겨놓은 진(鎭)으로 제주도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됐다. 김녕읍에 있던 진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여 별방진(別防鎭)이라 했다.

별방진을 지나 해변길을 걷는다. 눈부시게 푸른 바다가 검은 현무암과 부딪치면서 하얀 포말을 만든다. 바닷가에는 신동코지 불턱도 보인다. 신동코지 불턱을 지나면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네모반듯하게 담을 쌓아놓은 각시당이 있다. 각시당은 바람의 여신인 영등할망에게 해녀들과 어부들의 무사안녕을 빌고 풍어를 기원하는 의례를 치르는 곳이다. 이곳 하도리 각시당에서는 매년 음력 2월 13일에 영등굿을 치른다.

길을 걷다가 해변 바위에 앉아 있으면 파도와 바람도 우리 곁에서 잠시 머물다 간다. 어느덧 토끼섬이 눈앞에 와 있다. 토끼섬은 하도리 굴동해변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깝다. 토끼섬은 아주 조그마한 섬인데, 7월부터 9월 사이에 섬 전체가 문주란 꽃으로 장식된다.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문주란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토끼섬에서만 자생한다.

‘영등의 바당, 하도어촌체험마을’ 표지석을 지나자 야자수 가로수 아래로 하도해수욕장 백사장이 펼쳐진다. 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바다 속 모래가 훤히 보일 정도로 물도 맑다. 멀지않은 내륙에서는 지미봉이 해수욕장을 감싸주고, 바다 건너에 떠 있는 우도가 해변을 안온하게 해준다. 우도는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리는데, 그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볼 수 있는 곳이 이곳 하도해수욕장이다.

지미봉 정상에서 바라본 전경.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성산 일출봉, 모자이크 같은 밭이 어울려 아름다운 그림 같은 풍경을 이룬다.

하도해수욕장에서 도로로 올라가니 안쪽으로 커다란 호수가 있다. 이곳은 원래 작은 만(灣)이었고 용흥포라는 포구까지 있었지만, 방파제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호수가 됐다. 특히 이 호수는 주변 지하에서 솟아나는 용천수와 바닷물이 만나면서 해안습지가 됐다.

이제 밭길을 지나서 지미봉으로 오르는 숲길을 걷는다. 마을길을 걷다가 해변길로, 해변길에서 밭길로, 밭길에서 산길로 이어지는 올레길을 걷다보니 마치 여러 개의 막으로 이뤄진 연극을 보는 것 같다.

지미봉 정상에 올랐다. 지미오름에 서서 사방에서 다가오는 풍경화를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쳐온다.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성산일출봉, 조각보 같은 밭이 어울린 모습은 천하절경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 손색이 없다. 일출봉을 향하고 있는 우도 역시 모자이크 같은 밭, 바다와 함께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초록 빛깔의 밭과 환한 에머랄드빛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맑고 경쾌해진다.

다랑쉬오름을 비롯한 수많은 오름들은 엄마의 젖꼭지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묵묵히 나를 지켜주던 아버지처럼 든든하다. 지척에서 다가오는 종달오름과 알오름은 밖으로 크게 타원형을 그린 종달오름이 있고, 그 안에서 알오름이 다시 솟아있어 두 번 폭발한 이중화산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지미봉 아래에 자리를 잡은 종달리 마을의 파랗고 빨간 지붕들은 머리를 맞대고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는 것 같다. 멀리 바라보이는 해녀박물관이 있는 구좌읍에서부터 오늘 걸었던 밭길과 해변길을 위에서 바라보니 감회가 새롭다.

종달리 마을로 내려가는데도 일출봉 방향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대로 가슴에 안겨온다. 바다 건너로 보이는 일출봉과 식산봉이 바다에 떠 있는 배 같다. 일출봉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작된 제주올레 21개 코스가 종달바당에서 일출봉을 바라보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제주도의 마을과 밭, 해변과 오름을 잇는 긴 선(線)의 여행은 이제 내 가슴 속으로 이어진다.


여행쪽지
▶제주올레 마지막 코스인 21코스는 제주해녀박물관에서 시작하여 면수동마을회관-별방진-하도해수욕장-지미봉-종달바당까지 10.1㎞ 거리에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제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동회선일주버스 701번(소요시간 약 1시간10분)을 이용하여 상도리 정류소로 이동→건너편 바닷가 방면으로 약 200m 도보로 이동하면 해녀박물관 앞으로 시작점이 보인다.
▶종점에서는 바다를 등지고 마을 방면으로 약 1㎞ 도보이동→종달초등학교 앞 버스정류소에서 동회선일주버스 701번(소요시간 약 1시간10분)을 이용하여 제주시로 이동한다.